과학한다, 고로 철학한다 - 무엇이 과학인가
팀 르윈스 지음, 김경숙 옮김 / Mid(엠아이디) / 201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과학한다, 고로 철학한다>

(원제: The Meaning of Science)

르윈스(Timothy Lewens) | 김경숙 옮김  |  MID

 

 

 

     당신은 과학적인가?

   

     우리가 의심없이 사용하는 과학적이라는 말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우선 물음에 답하기 위해 과연 과학은 무엇인가를 먼저 분명히 해야할 것이다. 케임브리지 대학 과학철학 교수인 르윈스는 권의 책에서 과학이란 학문의 정체성(1) 과학의 가치(2) 다양한 논쟁점들을 소개하며 폭넓게 고찰한다. 르윈스는 대중에게 과학철학분야의 논점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중에서도 무엇을 과학이라 부를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관점과 이에 관련한 논점들을 엮어 놓은 것이다. 실로 다양한 과학분야를 떠올려볼 있는데, 중에서도 물리학과 생물학 특히다윈의 <종의 기원>둘러싼 오랜 논점과 유전학의 발전 이후 새로 해석되고 보강된 생물학 분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과학의 요건 포퍼의 관점

     우리가 무언가를 과학이라 정의할 있을까를 물었을 , 르윈스는 포퍼의 과학론부터 소개를 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포퍼는 귀납법 자체를 비합리적이라 믿을 없다고 생각한 듯하다. 포퍼는 과학이 연역적 추리를 통해서만이 진보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39)’ 하였다. 반면 르윈스는 과학체계로서 귀납적 접근방식에 대해 포퍼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 르윈스는 포퍼가 귀납법을 포기하고 연역법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일은 어떤 이론가도 현실에서 손을 떼는 것과 같다.’라고 비판한다. 누군가 과학은 자체로 완전한가라고 묻는다면 결국 과학도 인간이 하는 행위라고 말할 수밖에 없겠다. 르윈스가 말한바대로 과학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다는 말은 개방적이고 창의적이며 예민해야한다는 말이면서 동시에 어떤 경우에는 눈을 가릴 필요도 있다’(68)라고 하는 것처럼 과학은 스스로 완전하지 않음을 시사한다. 결국 과학은 사람이 하는 것이므로 그렇다. 따라서 누군가 과학은 가치중립적인가?’라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나는 약간 달리 표현하여 그럴 필요 없다.’라고 말하겠다. 다시말해 과학이 가치중립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충분조건이지만 필요조건은 아니다라고 말할 있을까.

          

     과학적 방법에 있어서 귀납적 추론을 인정하지 않는 포퍼의 관점에서 과학이 과학일 있는 요건 추정과 반박’(혹은추측과 논박’)이라고 저자는 소개하고 있다. 포퍼에게 진정한 과학이란 반증될 가능성을 지닌 학문만이 과학이다’(41)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을 이해할 있는 자료로 저자는 파인만의 강의(유투브 비디오 자료) 언급하고 있다(42). 포퍼의 추정과 반박이라는 관점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는 말은 파인만의 강의를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있다. 우리가 수행하는 과학적 작업 과정에서 흔히 단계로 어림짐작(guessing) 통해 가설을 세우게 된다. 물론 어림짐작에는 타당한 근거가 있어야하며 필요한 경우 수학적인 논리가 있어야 것이다. 파인만에 따르면 어림짐작을 통해 세워진 가설은 실험결과에 따라 판가름난다는 말이다. 짐작이 실험과 일치하지 않으면 틀린 겁니다. 과학은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라는 말에서 포퍼의 추정과 반박이라는 간결한 과학의 요건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무를 반듯하게 자르듯 과학의 요건을 포퍼의 주장대로 따르기 어려운 경우도 발생한다. 르윈스가 과학의 딜레마라고 언급한 것처럼 어떤 경우에는 과학자들이 눈가리개를 하고 있을 가장 발전을 이룬다’(68)라고 있는 부분이 생겨난다. 예컨대 소립자의 하나인 뉴트리노가 빛의 속력을 능가한다는 그란사소 실험 결과에 대해 과학집단이 보인 반응(156) 보면 보다 쉽게 이해할 있다. 대부분의 과학집단은 우선 결과를 그대로 믿고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폐기했던 것이 아니라 실험기구의 조작이나 절차에 있어서의 문제 가능성, 이론적 적용에서 생겨날 있는 문제점들을 우선 의심했다. 물론 결론은 우리가 알고 있듯이 실험 결과에 대한 해석에서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과학자들이 세운 가설이 과학자의 세계관, 가치관, 경험이나 문화의 차이로인한 영향으로부터 과연 무관한가라고 묻는다면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아니다라는 점이다. 따라서 포퍼가 주장한 과학의 요건(‘추정과 반박’) 자체로 중요한 요건의 하나로 받아들여질 있으나 자체로 완전하지 않다라고 결론을 내릴 있을 같다.

 

 

     학창시절 읽었던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믿음직스럽지 못한 나의 기억에 의하면, 토마스 쿤이 주장했던 과학혁명은 불연속적이고 단계적 특성을 띄고 있었다. 달리 표현하면 변증법적 구조와 유사했다고 기억한다. 당대의 과학 집단이 신뢰하는 정상과학이 존재()한다면, 소수의 집단에 의해 참신하고 혁명적인 혹은 반대되는 의견() 나오고, 만약 여러 재현 실험을 통해 설득력있는 증거가 많이 나오면 기존의 패러다임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바뀌는 혁명() 일어난다는 순환적이고 단계적인 과학 발전의 모습으로 알려져있다. 하지만 이처럼 유명한 과학사의 저서에도 후대의 연구자들에 의해 수많은 논의가 있었으며 비판이 가해졌다. 르윈스가 언급하는 이론의 한계는 물리학이 전공인 토마스 쿤의 이론은 물리학 분야에 적용하면 설명할 있는 부분이 많은 반면, 패러다임 전환 이론을 다른 과학, 예컨대 생물학 내에서의 이론의 변화를 설명하는데는 적합하지 않다는 (141)이다.

 

     다시 기억에 의존하면 처음 <과학혁명의 구조> 읽었을 기억나는 개념이 “incommensurability” 라는 용어였다. 당시 번역된 책에는 개념이 동일선상에서 비교 불능으로 번역되었다고 기억하는데, <과학한다, 고로 철학한다>에서는 공약불가능성으로 번역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어려운 단어에 대한 번역은 동일선상에서 비교 불능이라는 해석이 이해하기 쉽게 느껴진다. 개념에 대해 르윈스는 쉬운 (120) 들어 설명하고 있다. 자신의 아이를 각각 다른 단위의 자로 키를 잰다고 하자. 아이는 키가 120센티미터였으며, 작은 아이는 키가 3피트 2인치로 측정되었다고 하면, 누구의 키가 큰지 어떻게 있는가? 결과를 모두 미터 단위 또는 피트 단위로 통일하여 비교해야 서로 비교할 있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같은 기준에 맞추어야 서로의 키를 견주어볼 있다. 쿤의 패러다임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과연 뉴튼의 연구와 아인슈타인의 연구 어느 것이 뛰어난가라고 물었을 , 패러다임의 언어를 다른 패러다임의 언어로 통일해 있다면 서로 비교가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쿤의 입장은 서로 다른 패러다임을 같은 기준(언로) 통일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서로 비교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다만 서로 비교할 있는 가능성이란 것이 전혀 없는가라고 묻는다면, 이는 새로운 토론의 주제가 수도 있겠다.

 

     쿤의 패러다임 이론에 대한 비판을 떠올려볼 , 물리학과 생물학의 학문적 방법론에서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가 궁금했던 적이 있다. 아마도 접근 방법의 차이로인해 쿤의 이론에 대한 비판의 빌비를 제공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나의 의문에 대한 답은 아니더라도 가지 실마리를 찾아볼 수는 있었다. 물리학의 경우, 흔히 물리학은 실험실이라는 통제된상황에서 연구를 복잡하게 있는 요인을 최소화한다는 (78)이다. 예를 들어 뉴튼의 역학을 설명하는 , 우선 하나의 운동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좀더 통제된상황을 만든다면, 공을 하나의 부피가 없는 으로, 그리고 공기저항도 고려하지 않는 이상적인 진공의 공간에서 상수 중력이 있거나 혹은 없는 가정하에 이동하는 가장 단순화된 모델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나면 좀더 현실적인 상황들을 고려하여 실제 물체의 운동까지 설명할 있다는 것이 (전통적인) 물리학의 연구방법론이라고 있겠다. 반면 생물학의 경우는 어떤가? 생물은 기본적으로 복잡계다. 수많은 원소들이 응집되어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서 생명현상이라는 현상이 발현된 존재다. 따라서 비교적 간단한 세포로 이루어진 생물도 있겠지만, 간단한 생물도 물리학과 같이 단순화 시키기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물리학자 슈뢰딩거가 생명의 본질에 대해 논한 <생명이란 무엇인가 What is Life?>라는 책에서도 물리학자의 관점에서 생명 현상을 열역학적인 물리학적 패러다임에 근거하여 탐구하였다. 단순한 아미노산의 배열인 단백질의 1, 2 구조와 달리 새로운 기능 생겨나기 시작하는 단백질의 3 구조의 원인과 해석에 대해서도 우리는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물리학적 방법만으로는 무언가 생명이라는 현상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해보인다. 하지만 생물학적 방법론에서 무엇보다 포퍼가 부정했던 귀납적 추론 방식이 많이 적용된다는 점이 물리학적 방법론과 다른 차이점이지 않을까. 나아가 호주의 철학자 프랭크 잭슨이 주장하는 바대로 과학적인 연구로도 도저히 알아낼 없는 어떤 유형의 진리가 존재’(344)하는 것은 아닐까? 회색지대의 존재가 많은 이들이 쿤의 패러다임 이론에 대해 비판하는 걸림돌이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다윈의 <종의 기원>을 둘러싼 논점들

     르윈스는 다윈의 저서 <종의 기원> 쿤의 관점에서 과연 혁명적인가를 묻는다. 물론 아니다 르윈스의 답이다. <종의 기원>에서 다윈이 주장하는 변이론 당대의 박물학자들에게 새로운 이론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윈의 자연선택 신선한 설명이었음을 인정한다. 반면 인문학자 양자오가 저술한 <종의 기원을 읽다> 보면 다윈이 <종의 기원> 저술할 당시 출간을 둘러싼 여러 정황들을 설명해두었는데, 일반인들이라면 크게 관심을 두지 않을 만한 사항이었다. 하지만 <종의 기원> 신화화된 입지/지위를 고려하면 반드시 그럴까라고 의구심이 들게 정도의 사안이긴 하다. 특히 다윈의 조부의 미출판 원고의 제목이 <종의 기원> 원제와 상당히 닮아 있었다는 , 그리고 조부의 원고가 이미 있었음에도 다윈이 조부에 대해 <종의 기원>에서 전혀 언급을 하고 있지 않은 점은 과연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라는 말에 보다 신빙성을 주는 실마리가 있다. 물론 다윈이 중요한 저술을 것은 사실이지만, 커다란 업적이 과연 혼자만의 업적이냐라고 한다면 그렇지 않다라고 말할 있겠다. 다윈이 오랜기간 작업하던 <종의 기원> 원고를 어느 순간 급하게 출간 정황도, 사실은 비슷한 내용의 책을 출간하려는 다른 학자보다 먼저 책을 내려고 노력한 정황도 양자오 교수가 소개하였는데, 돌이켜보면 다윈의 연구도 결국 다윈이 디딜 있게 어깨를 내어준 거인의 존재(다윈 이전의 과학자, 인류의 지적 발견을 축적, 경쟁하는 과학자) 역시 고려해야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상황에서도 양자오 교수는 다윈의 업적이 인간이 자연을 이해하는 관점을 바꾸어 놓았다 평하고 있으며, 르윈스 역시 (쿤의 관점에서 혁명적 업적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다윈은 기존의 연구를 인정하고,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하는데 썼으며 새로운 해석까지 내놓았다.’(181)라고 평하고 있다.

 

     다윈은 비글호를 타고 5년에 가까운 시간을 탐험하면서 수많은 생물들을 관찰하고 자료를 수집할 있었다. 그의 과학적 방법론을 고려할 다윈은 포퍼가 부정한 귀납적 추론 크게 의존했다. 수만 개의 생물 표본을 수집할 있었던 다윈은 당시 주도적이던 생물의 분류 방법을 다른 각도로 바라보았다는 점도 그가 <종의 기원>에서 새로운 해석을 있었던 중요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불완전성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 귀납적 추론 평생 색채 대한 연구를 하기도 했던 독일의 대문호 괴테의 과학적 방법론의 근간이었다. 괴테는 치밀한 관찰과 방대한 자료 수집을 통해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해내는 것을 중요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대에 귀납적 추론 매우 중요한 과학 연구 절차로 받아들여졌다고 이해할 있다. 물론 사물을 보다 깊이 관찰할 있는 도구와 지식이 오늘날과 달리 크게 부족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결론을 도출했을 것이다. 따라서 연역적 방식과 달리 관찰에 대한 해석에 영향을 있는 요소가 많을 있고, 특정 과학자 과학집단의 이해 내지는 패러다임을 너머서는 해석을 내리기 힘든 경우가 생긴다. 포퍼가 신뢰를 보였던 연역법은 최초의 가정이 옳지 않았다는 것이 실험을 통해 밝혀지면 근거부터 흔들리고 심지어는 무너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포퍼의 과학체계는 말뚝 위에 지어진 건물이 아니라 공중누각이다.(55)’라고 르윈스는 비판하고 있다. 결국 과학적 방법론에는 어느 쪽도 영원불변한 도그마처럼 규정되어야할 것이 아니라 각각 불완전함을 가진 방법론이 서로 상보적 역할을 해야만 같다. 권을 책을 읽는 사람마다 다른 이해도와 해석을 보여주듯, 과학에서도 수많은 해석, 견해, 오독이 모여 서로 충돌하는 장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윈의 업적을 생각할 잠깐 옆길로 빠져보면, 말콤 글래드웰의 저서 <아웃라이어> 관점에서 다윈은 혜택받은 자임에 틀림이 없다. 당시 여러 과학자들 중에서도 영국에서 유일하게 과학자로서 비글호에 승선할 있었던 기회, 5 간의 (무사고) 항해를 통해 관찰한 생물들과 수집해온 만가지 생물 견본에 대해 접근할 있었다는 점은 글래드웰의 관점에서 보면 누구나 누리기 힘든 혜택이라 말할 있다. 물론 오랜 시간 진지하게 연구를 하고 지식을 쌓아온 시간이  전제되어 있었고, 명망있는 집안이라는 신분의 보장이 있었기에 이런 기회를 누릴 있었음을 기억해야할 것이다. 나아가 종교집단의 견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종의 기원> 발표할 있는 시대적(역사적) 여건과 공간적 여건(비교적 자유롭고 반항적으로 과학적 결과를 발표할 있었던 영국이라는 공간) 무시할 없을 것이다. 단순히 그의 천재성에 대한 신화화만으로 그의 업적을 평가하기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다. 물론 다윈의 업적을 폄훼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평생 준비했던 다윈의 업적이 앞에서 언급한 여러 조건에 힘입어 중대한 결실을 맺게 되었다는 점과 개인의 건강문제(평생 고통을 받던 두통과 신경증적 소인) 극복하고 이루어진 인류사의 커다란 업적이라는 점을 부인할 없다. 결국 과학도 장대한 인류 역사의 증거물인 인간이 하는 것임을 언제나 고려해야한다.  

 

 

 

 

책의 2부에서는 과학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고민한다. 공교롭게도 과학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화두로 다윈의 말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과학하는 자는 어떠한 소망도 어떠한 애착도 가져서는 안된다. 그는 돌과 같은 마음을 지녀야 한다.”(188) 오늘날이 과학자를 비롯하여 교양있는 일반 대중들에게 말이 설득력있게 다가오지 않겠지만, 당대의 다윈은 나름 확고한 과학에 대한 관점, 철학을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반면 르윈스는 과학자는 가치 개념을 지닐 더욱 현명한 조언을 있다’(192)라는 견해를 피력한다. 예를 들어 미국의 핵무기 개발 정황을 떠올려 있다. 2 세계대전이 한창일 , 헝가리 물리학자 레오 질라드와 함께 아인슈타인은 당시의 대통령인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미국이 핵무기 개발을 하도록 촉구하였다. 그러나 전쟁의 막바지에 이르러 핵무기의 파괴력을 실감한 사람은 다시 당시의 대통령인 트루먼 대통령에게 핵무기 개발 중단을 탄원하는 편지를 보낸 것은 과학자가 가치 개념을 지니고 현실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사례라고 있다.

 

     만일 과학자가 엄격하게 가치 중립적이어야한다는 다윈의 원칙을 지켜야한다면, 또한 보다 재앙 초래할 수도 있다. 만약 과학자가 히틀러의 나치 정부 아래서 히틀러의 명령을 성실히 따르기만 했다면 수많은 유대인 학살에 관여했던 아이히만처럼 2 아이히만이 나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을까? 과학자도 결국 독립적인 개인으로서 가치중립적일 없으며, 나아가 가치판단을 하고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여기에는 스탈린 치하 소련의 유전학 사례(192) 생물학자의 그릇된 가치관(혹은 폭력적으로 강요받는 상황에서 묵인하거나 답습하는 과정을 통해 형성된 가치관) 떠올린다면 과학자가 단지 가치 개념을 지니는 문제를 넘어, ‘어떠한가치관을 갖는지의 문제가 선과 악의 행위를 판단하는 중요한 근거가 것이다. 과학 역시 이를 수행하는 사람( 과학자 정치인) 의해 양날의 칼이 있음을 시사한다.  

 

 

     이타적 행위에 대해

     생명체의 이기성, 이타성에 관한 문제는 나의 개인적인 관심대상이기도 하다. 과연 인간 다른 동물의 이타적 행위를 어떻게 설명할 있을 것인가? 이타성을 설명할 , 르윈스는 이타성을 생물학적 이타주의(238) 심리학적 이타주의(235)로서 구분하여 소개하고 있다. 생물학적 이타성은 현대 유전학의 발전으로 인하여 유전적인 증거에 크게 의존하고 있으며, 인간을 비롯한 다른 모든 생물체에 모두 적용할 있다. 물론 르윈스는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에서 생물학적 (유전적) 이기성/이타성에 대해 논하고 있음을 재확인하고 있는데, 도킨스의 유전자 중심 관점에 대해 비판한다(244). 유전자 자체가 어떤 동기를 가지고 행동을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 특성/경향성만을 갖고 있다.’라는 점에서 인간의 행동이 사실은 유전자가 의도한 동기를 위한 것이라는 도킨스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반면 심리학적 이타성은 행위의 심리적 동기에 초점을 맞추며, 심리적 상태를 지닌 생명체에만 적용이 가능하다는 제약이 있다. 다시말하면 박테리아가 심리적으로 이타적인가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지만, 생물학적으로 이타적인가는 물을 있다는 것이다.

 

     이기성/이타성의 문제에서 흥미로운 논의 주제는 과연 생물체에서 이타성이 발현되는 것은 유전적 기제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문화적 기제에 기인하는가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타적 행위와 관련하여 문화적인 (후천적 영향) 의한 것일 수도 있다는 관점(258) 더욱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문화적인 영향 좀더 폭넓게 적용할 있다면, 전지구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핵가족화/혹은 가족의 해체 현상을 떠올려본다. 수럽-채집 시대와 농경 시대, 그리고 산업 혁명 시대 이후 급격하게 변화된 인간의 삶의 양식으로 인하여 이타성이라는 행위는 유전적이라기 보다는 문화적 영향에 따라 영향을 더욱 크게 받는다는 관점이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다는 점은 매우 흥미로운 소식이다. 핵가족화 가족의 해체에 따라 우리가 겪는 이타적인 행위는 오히려  SNS등의 통로를 통해 모인 동호회 사람들의 연대 행위가 더욱 이타적인 행위로 보인다는 점은 이타적 행위에 대한 문화적 힘의 영향을 더욱 설득력있게 나에게 다가온다.

 

 

     인간의 본성은 고유한가?

 

     이타적 행위를 이야기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문화적 역할은 역시 인간의 본성에 대한 최근의 주장들 처럼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자연보다는 문화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데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269). 그러면 인간의 본성 Nature이라는 막연한 개념을 이해하는데 과학은 어떤 도움을 있을까. 르윈스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 본성 등에 대해 연구를 해온 스티븐 핑커는 인간의 본성을 인정하는 입장이다(263). 반면 르윈스는 최근의 과학적 연구가 인간의 본성 대해 의구심을 표하는 관점을 받아들이고 있는 듯하다. 인간의 본성이 존재한다는 것에 의문을 표한다. 인간이 고유한 본성 갖고 있다는 것은 인류의 역사에서 수많은 철학자들이 논쟁을 해왔던 주제이기도 것이다.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거나 악하다는 점에 대해 논쟁한 동양의 철학자도 있으며, 이는 서양철학의 전통도 주제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그런데 현대 과학에서 주도권을 얻고 있는 입장은 인간의 본성자체를 미신이라고 말한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현대 과학이 인간의 본성 부정하는 것은 인간만의 고유한 본성을 인정하고 있는 서양의 기독교 전통과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다. ‘신은 인간을 창조하여 새와 물고기와 짐승을 다스리게 했다라고 명하는 구약성서의 신은 윤리학자 피터 싱어가 <죽음의 밥상>에서 사용한 개념인 종차별주의 존재의 근원이 것이다. 피터 싱어에 따르면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 고유의 특징이 있고 따라서 인간만이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생물계의 (species) 개념을 고려하여 종차별주의자라고 하였다. 인간에게 고유한 본성이 존재하고 인간은 다른 생물체보다 우월하다는 서양 기독교 관념은 이런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주장을 하는 사람에 대한 비판을 하게 것이다. 예컨대 인간의 고유한 본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인간 복제 윤리를 인간 본성에 대한 모독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인간이 아닌 생명체에 대한 통제권을 용인해주는 빌비를 제공할 있다. 말하자면 밀란 쿤데라가 그의 소설 <참을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언급한 인간이 염소를 죽일 권리 신이 아닌 인간이 저술한 <구약성서> 공표함으로써 인간이 스스로 다른 동물을 지배할 권리를 부여하는 아이러니를 낳게 것이다. 자연의 질서를 이야기하면서 무성생식이 유성생식보다 열등하며,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못하다.’라고 주장하는 레온 카스는 그대로 종차별주의자라고 있을 것이다. 나아가 그는 논리로 우월한 종인 인간 복제의 윤리적인 허용에 반대하는데 적용하고 있다. 생물종의 우열을 성적인 방식에 의해 구분하는 것은 다분히 자의적이고 지나치게 인간중심적인 시각이다. 르윈스는 이렇게 인간 중심적인 인간 본성 개념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인간 본성이라는 개념이 윤리적 토론에서 사용되면 혼란을 일으킬 있으며, 집단의 본성에 따른 사고가 특정 인종, 성에 대한 적형적인 사고를 강화하기도 한다는 점이다(296).

 

 

     당신의 자유의지(free will) 허구다?

     이제 마지막 장에 이르러 다른 흥미로운 주제를 저자는 책에서 던지고 있다. 인간의 자유의지란 있는가? 현대의 신경과학 분야의 연구에 기반한 흥미로운 주장은 주관적인 자유 체험은 환상에 불과하다’(300)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는 모양이다. 나의 혼란스러운 마음처럼 저자인 르윈스도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는 아니고 어떤 의미에서는 신빙성있게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말할 있단 말인가?’라고 반문한다. 리벳의 실험과 같은 신경과학적 연구에 의하면 팔을 굽히기와 같은 순간적이고 자발적인 운동이 일어나기 준비 전위 알려진 뉴런 활동이 증가하는 것을 발견했다(327)’ 결과적으로 준비 전위가 실험참가자가 팔을 굽히고 싶다는 욕구를 느끼기 350밀리초 , 그리고 팔을 굽히는 행동을 하게 되는 시점보다 550밀리초 전에 이미 시작된다는 말이었다(328). 흥미로운 결과는 결국 우리의 자유의지가 우리가 하는 행동의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며 나아가 자유의지는 허구다라는 주장을 지지하고 있는 것같다. 르윈스는 현대 신경과학이 자유의지란 없다라는 입장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는데, 우선 준비 전위 본질이 잘못 해석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뉴질랜드의 연구진이 행한 실험을 들면서 준비 전위는 행동하기 위한 무의식적인 결심이라고 보기 힘들다라고 말한다(332). 아울러 우리는 실험 참가자들처럼 개개인의 욕구와 무관하게 통제된 환경에서 결정을 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이들은 인위적인 지시를 받아 행동해야만 했던 것인 반면, 일반적인 경우는 엉뚱한 결정도 그만큼 적절한 상황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아울러 자기공명영상을 통해 뇌를 연구하는 경우처럼 장비의 높은 정확성 과장해서는 안된다(335) 르윈스는 말한다. 뇌의 활동부위의 지역적 차이가 개개인의 습관, 무의식적 편견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있다고 의문을 표한다. 따라서 이런 방식, 자료들은 인간의 의식적인 결정이 허구임을 증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입장이다. 이렇게 르윈스는 신경과학분야가 주장하는 바처럼 인간의 자유는 환상이다라는 것을 입증하는데 실패했으며 여전히 의식적인 욕구가 행동의 원인이 된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인간에 대해 설명을 하려는 과학의 시도를 살펴보면 역사적으로 철학자들이 했던 궁극적인 물음, ‘인간이란 무엇인가?’ 대한 궁금증으로 돌아가는 듯하다. 과학도 예외가 아니어서 과학적 연구 방법이나 도구가 진보함에 따라 과학자들도 결국은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지에 대한 탐구를 이어나가게 되는 모양이다. 다만 신경과학 분야의 연구결과를 보면 인간은 기계와 다를바가 없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인간을 기계와 같은 존재로 보는 관점은 이미 데카르트와 같은 철학자가 생각했던 모양이다. 인간을 움직이는 기계, Machina Animata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그의 인간관은 어떤면에서 보면 오늘 날까지도 프랑스 철학의 기조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보다 다양한 인간관이 존재하겠으나, 인간이 하나의 기계라는 관점은 서양철학이 바라보는 인간관의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도 있겠다. 다시 말하면 시대와 공간에서 자유로울 없는 인간이 완벽하게 가치중립적일 없다고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주장도 이러한 문화적, 역사적, 환경적 맥락에서 자유로울 없다고 생각한다.

    

     원제가 과학의 의미 고찰해보려는 <과학한다, 고로 철학한다> 과학을 둘러싼 여러 폭넓은 논쟁점들을 아우르고 있다. 이에 대해 저자는 적극적으로 논쟁에 뛰어들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독자로서 나는 그의 주장이 독자를 강요한다고 느끼지지는 않는다. 르윈스가 책을 마무리하면서 과학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것은 과학이 혼자서 답변할 있는 문제가 아니다.(350)”라는 열린 자세로 오히려 독자에게 결론을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하나의 정답만을 얻는데 익숙한 우리로서는 다소 맥빠지고 실망스럽다고 느낄 있지만, 과학을 바라보는 관점은 시대에 따라, 인간의 지식의 수준에 따라, 그리고 문화적 맥락에 따라 다를 있음을 책에서 배웠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가 어떤 답을 설정한다고 해도 후대에는 과학의 가치는 달라질 있지 않을까?

 

     책은 폭넓은 주제를 소개하고 있는 만큼 깊이 있는 논의의 과정을 보여주는 데는 지면의 한계가 있을 것이다. 다만 르윈스는 책이 과학이 가져야하는 요건이나 과학의 의의를 생각해보는데 막연하게 느끼는 독자에게 좋은 안내가 있을 것이다. 관심이 가는 주제는 참고문헌을 통해 보다 구체적인 이해를 있도록 소개하는 과학철학분야의 카타로그 같은 책이 아닐까하는 인상을 받게 되었다. 물론 나의 부족한 지식과 이해로 인한 오독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다양한 오독을 거치고, 새롭게 이해를 하고 고민을 하는 과정을 통해 보다 온전한 전체상이 드러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따라서 나는 나의 오독을 걱정하기보다 앞으로 흥미있는 생각거리가 늘어난 같아 오히려 반갑다. 한가지 배우게 점은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인문학 뿐만 아니라 과학도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하는 인간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게 해주는 기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말하면 개인적으로 <과학한다, 고로 철학한다> 읽고 재확인 과학의 가치는 과학도 인간의 이해를 더해주는 인류의 업적이라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트] 『도련님』의 시대 1~5 (완결) 세트 - 전5권 - 혹독한 근대 및 생기 넘치는 메이지인
다니구치 지로 그림, 세키카와 나쓰오 글, 오주원 옮김 / 세미콜론 / 2012년 10월
평점 :
품절


나쓰메 소세키가 살았던 시대가 어땠을까 상상할 수 있었다. 술만 들어가면 주사가 심했다는 이야기나, 스치듯 지나간 안중근 의사와 나쓰메 소세키와의 인연도 놀랍다. 한편 일본의 근대를 견인했던 일본의 지식인들이 이렇게 좁은(?) 공간에서 서로 인연을 맺고 닿아 있었다는 이야기가 흥미롭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경영/자기계발서 관련 나의 첫 독후의 감상)

우선 경영관련/자기계발서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편견이라면 편견일 수 있는 부분은 이런 분야의 책들이 경영학에서 나오는 이론에 치우친 것들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경영학에 대한 나의 편견 또한 한 몫을 했을 텐데, 오랜 인류의 지혜를 이익 창출, 효율화라는 대의 아래 마치 경영학의 위대한 법칙과 같은 것으로 광고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점이었다. 나아가 경영학은 조직이나 이익 창출을 위한 지혜를 담고 고민하는 기술이긴 하지만 과연 우리가 말하는 학문의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들이다.

개인적으로 자기계발서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는 (최근들어 더욱 우리의 삶을 팍팍하게 만드는 근본적인 요인이라 할 수있는) 자기계발서가 신자유주의적 가치관을 사람들에게 성실히 주입하여 이를 무비판적으로 내면화하도록 하고, 개개인을 무한경쟁 시장에서 훌륭한 상품으로서 기능하도록 하는 서적이 아닌가하는 나의 편견에서 비롯된다.

물론 나 자신도 <머리로 부딪치고 가슴으로 해결하다>에 대해 큰 기대를 갖고 읽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다만 매우 규모가 작은 중소기업에서 일하고 있는 나로서는 전설적인 실적을 낸 `판매왕`의 경험이나 경영이론울 소개하는 책들에는 관심이 없다. 이 책에는 작은 규모의 자영업자나 지점장/점포주가 참고할만한 저자의 노력과 경험이 고스란히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중소기업에서 일하면서 많은 문제점, 비효율성, 인간관계의 문제점, 영업상의 어려운 점, 지점간의 분쟁과 같은 문제점들이 눈에 들어 온가. 이 책에도 이러한 문제점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는데, 판매/영업실적에 대한 부풀리기식 자랑이 아닌 진심을 담고 간절함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점들에 시선이 가게된다. 이런 점들이 나처럼 자기계발서나 경영서에 대해 불신을 가진`불량스러운` 독자가 끝까지 다 읽도록 한 장점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나아가 책을 읽으면서 나의 회사 생활을 다시금 돌아보게 되었다. 결국 어느 책을 읽든 책에서 다루는 문제들이 결국 내 문제가 되지 못하면, `나의 경우라면 어떻게 했을까?`의 지점까지 이르지 못하면 의미없는 독서가 될 것이다. 나는 어떤 면에서는 비판적이거나 부정적으로 현실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반성해본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을 끊임없이 한다고 내가 가진 불만이 해소되거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처해있는 상황에서, 나에게 주어진 조건과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로 개선해나가야 하는 것이 현재 나에겐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보있다. 타인이 잘못한 것만을 보고 비판만 했던 것은 아닌지, 나 스스로로 합리적으로 그리고 주도적으로 나의 능력을 형상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는지 나를 다시 들여다본 계기가 되었다.

최근 <미생>이라는 만화를 통해 직장인이 겪는 삶의 조건들에 많은 이들이 공감을 하듯, 저자가 이 책에서 언급하는 `실패하는 지점장 유형`에 해당하는 상사가 있다. 그것도 저자가 본문에서 언급도 했지만 어느 한 유형 하나에만 명확히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유형에 걸쳐(종합선물세트처럼) 다양한 특성에 속하는 상사.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정말이지 큰 기업도 아닌 작은 사업장에서 회사의 `명줄`마져 끊을 수도 있는 유형이다. 다시금 책을 읽으면서 내가 그런 자리에 있을 경우 어떻게 해나갈 것인가까지도 생각해본 시간이었다.

어느 책이나 마찬가지 겠지만 책이 언급된 저자의 방법론과 사례는 저자의 상황과 문제해결 과정을 거쳐 고민해온 흔적이다. 따라서 좋아 보이는 경영이론이나 저자의 성공적인 경영 사례는 좋은 참고가 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처한 현실에 그대로 바로 적용하기는 힘들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책을 읽을 때 살펴봐야할 것들이 바로 세부적인 사례 이면에 감추어져 잘 보이지 않는 저자의 철학, 근본적인 원리/원칙을 파악해보는 일이다. 책 전반을 통해 언급되고있는 `인간존중`의 기준은 그 중 하나다. 사람 한명 한명을 그저 조직의 소품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동료로 보고 서로 발전을 위해 같이 고민하는 것이 조직의 장으로서 갖추어야할 자세가 아닐까 생각해 보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나아가 저자가 사람에 대해 갖는 따뜻한 시선이 느껴져서 책을 읽는 동안 기분 좋게 읽을 수 있었다.

———————————————————

경영/자기계발서를 읽으며 독후감이라니! 나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고 계획도 없었으나, 책을 읽으며 메모한 내용들이나 떠오른 단상들을 조금은 붙들어 두고 싶었다. 이 글은 분위기 잡고 쓴 독후감이나 서평은 아니다. 다만 나의 단상을 좀더 편하게, 자유롭게 메모해두고 싶었을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나는 무관심을 증오한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나는 무관심을 증오한다 - 그람시 산문선
안토니오 그람시 지음, 김종법 옮김 / 바다출판사 / 2016년 3월
평점 :
품절


**마침내 신간평가단의 마지막 책을 보고 늦은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무언가의 마지막에는 후련함과 동시에 아쉬움이 남습니다. 허투루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언제나 지나고보면 좀더 열심히 할 수 있었을 텐데... 아니면 만족스럽지 못한 점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네요. 작년 말 처음 알라딘 서재 문을 열자마자 신간 평가단을 발견하고 신청했던게 덜컥 되어버려서...한마디로 초짜가 리뷰를 하니 많은 답답함과 부족함을 느낍니다. 마지막 리뷰도 늦었습니다만, 부족하나마 좀더 고민을 하고 쓰고 싶었는데, 내공이 부족한 것은 어쩔 수 없네요. 다른 분들의 글을 보면 그저 부럽기만 합니다. 하지만 현재 제 수준에서 해 볼 수 있는대로 하려고 노력했고, 그 과정이 참으로 즐거웠던 것은 꼭 밝혀두고 싶네요. 글을 정말 못쓴다는 것은 제 스스로가 잘 아는 일입니다. 다만 앞으로 조금이나마 나아지리라는 기대로 꾸역꾸역 따라왔던 것 같네요. 리뷰를 써본 경험도 없는 저에게 신간 평가라는 기회를 주신 알라딘에도 감사를! 그리고 다시 말씀드리지만 인문 분야 책에서 어려운 책들을 많이 만났지만 또 다시 천천히 읽어보고 싶은 좋은 책들입니다. 리뷰 과정에서 흠을 잡거나 비판적인 시각에서 쓴 부분도 있을 텐데, 책을 만드는데 참여하신 분들이 혹시나 제 어줍짢은 평을 보고 언짢으셨을 분들이 계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책을 평한다는 것이 많은 분들의 시간과 노고가 들어가는 일이라 한 마디의 말로 쉽게 평하려고 했던 제가 너무나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좋은 책을 꾸준히 만들고 계시는 분들께 또한 고마움과 격려를 보냅니다.  

 

 -----------------------------------------------------------------------------------

 

 

 

<나는 무관심을 증오한다>

안토니오 그람시 지음| 김종법 옮김 | 바다출판사

 

     그람시가 남긴 자취에 내가 처음 접하게 계기는 그람시가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던 썼다는 한편의 이야기였다. ‘어린 아이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 문장이 담겨있는  <생쥐와 >이라는 동화책이었다. 그람시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몰랐지만, 감옥에서 썼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다소 싱거워보이기까지 동화책이 과연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건하고 무솔리니에 의해 감옥에 갖힌 지성인이 있었던 글인지 의심스럽고 더욱 궁금증이 생겼던 기억이 있다. 경제 이데올로기로서 공산주의와 정치 이데올로기로서 사회주의를 지지한 정치인 안토니오 그람시는 어린시절 꼽추와 유사한 신체적 질병을 앓은 적이 있고, 그로 인하여 징집이 면제되었다고 한다. 한편 성인이 되어 토리노 대학에 입학, 언어학과 철학 공부를 시작하였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중퇴한 기록이 있다. 개인적인 신체적 장애, 크고 작은 병치레에도 불구하고, 그람시는 이탈리아 공산당의 설립자 명으로 하원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무솔리니 정권에 의해 불법 정당으로 지목된 이후 20년이 넘는 감옥형을 받았다고 하며, 남긴 기록은 <옥중수고>라는 제목으로 남아있다. 정도면 인간을 규정하기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사람의 면모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는 자료라고 생각한다.

     책에 나오는 산문들은 사회에 깊은 관심을 가진 것을 넘어 행동으로 실천하려 했던 인간의 자취다. 물론 여러 주제에 따라 구분한 글들의 모임이고, 주제마다 대체로 시간 순에 따라 배열을 놓았기 때문에, 아무래도 일관성이나 글의 유기성이 하나의 주제 아래 저술된 책에 비해 떨어진다. 여러 군데에서 언론 검열 대한 비판을 하는 것처럼 저자의 관심이나 사안에 따라 일부 중복된 내용이 나오는 것은 감안 하고 읽어야 것이다. 물론 이것은 그람시의 자체보다도, 책의 편집상 특징에 기인하는 특징이라고 봐야하겠다. 6개의 주제어 아래 주제마다 대체로 시간 순서에 따라 글이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사이의 유기성이 다소 떨어지는 점을 제외하고 그람시의 날카롭고 지성적인 면모는 산문 전반에 걸쳐서 충분히 드러나고 있다. 책에 실린 글들은 그람시가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당(1921)하기 , 1917-1920년에 대부분 씌여진 것으로, 공산주의에 경도된 이데올로기적인 주장보다는 기득권과 사회의 문제점들을 비판하고, 사회와 대중을 계몽하려는 의지, 그람시의 지성적인 면모를 보다 보여주고 있다. 그람시가 사회에 대해, 정치나 교육 등에 대해 파악하고 분석하는 대목은 현재 대한민국 사회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정치인과 공무원들에 대한 비판을 비롯하여, 교육의 상품화에 대한 비판, 언론 검열제도 비판 표현의 자유에 대해, 그리고 지금도 크고 작은 전쟁이 끝나지 않고 지속되는 지구촌에서 전쟁에 반대한다는 그람시의 목소리는 우리가 더욱 귀기울여 듣고 생각해볼 있는 중요한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100 혹은 150 전의 지성인(헨리 데이빗 소로, 프리드리히 니체 )들이 글들만 봐도 당대에 이들이 비판했던 문제점들이 여전히 문제점들로 남아있는 것들이 많아 보인다. 나의 좁은 소견이지만 보편적인 삶의 조건, 삶의 양식은 크게 변하지 않은 같다.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특권 계층은 언제나 존재했고, 나머지 계층과는 달리 분명한 대우와 경제적 혜택을 받아왔다. 그람시가 공무원을 비판하면서 자신들만의 국가를 건설하였다(142) 언급한 대목처럼 말이다. 공산주의자로서 그람시는 아무래도 자본주의의 문제점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는 대목이 많이 보인다. 그람시가 자본주의의 투기적인 속성’(127) 꼬집어 내는 , 부르주아라는 특권 계급의 특권을 유지하고 누릴 있도록 만든 경제적 형태가 바로 자본주의다’(162)라고 언급하는 부분은 현재 자본주의 사회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어렵지 않게 확인할 있다. 예를 들어 2003 월마트의 풀타임 조합원 연봉(18000달라) 966배를 받은 월마트의 CEO 스콧의 사례를 들어볼 있다. 스콧은 기본급, 보너스, 스톡 옵션을 합하여 2003 1740 달라를 받았다고 한다. 물론 사례는 아직까지는 극히 일부이며 극심한 격차를 보여주는 사례이긴 하지만, 과거 100 전에는 결코 없었던 일이다. 국내에서도 물론 정도의 격차는 아니지만 연봉 격차가 점점 심화되고 있다는 증거는 정부의 공식 발표자료를 통해서도 분명히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는 결국 고용 불안정, 노동 인권 침해와 같이 보다 다양한 양상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교육에 관하여 저자가 이야기하는 대목은 좀더 나의 피부에 닿는다. 특히 학력이라는 교육의 상품화를 비판하는 대목을 보면 그람시가 우리 사회를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다. 대학입학을 위한 수학능력시험 응시자가 30 수준인데 비해, 이제 한국사회는 매년 박사인력만 1 3천명이 배출되는 사회에 접어들었다. 박사학위가 새로운 상품 항목 처럼 되어가고 있다. 인구가 남한 인구의 20 수준인 중국과 인도와 비슷한 ( 15만명 수준) 미국 유학생 수가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높은 교육열이 대한민국을 이만큼 성장시킨 원동력이기도 하겠으나, 그만큼 제대로 교육의 기회와 같은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거나, 교육이 그만큼 기득권을 확보하기 위한 상품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여지는 있다. 고등학교 교육마저도 제대로 많이 받지 못하던 시대에 그람시는 이미 이런 문제에 대한 우려를 했던 것일까. 학위증서라는 것이 부적격인 이들에게도 자비롭게 수여되고, 공공의 공정한 삶을 망치는 상태로 이끄는 유용한 제도가 되어, 불투명하고  부정한 사회를 만드는데 활용될 있기 때문이다. 또는 노동자들이 흘려 거둬들인 생산성에 기생하면서 살아가는 어리석은 관료 계층만을 증가시킬지도 모른다.”(83)라고 그람시는 말하고 있다.  교육이라는 매개체는 권력 혹은 특권 계층을 양산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서만 기능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보게 해준 글들이었다.

     자본주의 비판: 그람시가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 전쟁은 자본주의 국가간에 상시적으로 발생하는 갈등으로 언제든 발발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하는데, 역사상의 모든 정쟁을 자본주의와 연관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다만 제국주의 시대에 초기 자본주의의 폐해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19세기 중엽 이태리 관세동맹과 같은 일들은 제국주의의 연장선 혹은 대체물이 자유무역주의나아가 신자유주의 연속성을 갖고 현대에 이르는 것은 아닐까. 1918 그람시가 글에서 자유무역주의라는 용어가 나오고 있는 또한 이미 초기 형태의 신자유주의적인 개념이 적어도 이미 20세기 초에는 잉태되고 있다는 단서로 봐야하지 않을까. 다시 정리해보면 그람시는 전쟁이라는 것이 자본주의 체제의 지배자들의 탐욕으로 일어나는 것이라고 보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저자는 분명히 어떠한 전쟁도 피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라고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나아가 경제 전쟁을 위해 무역보호정책을 요구하는 산업계의 경영자들과 군수산업의 고용인들 그리고 공포 유포자들의 음로를 피하면서, 모든 가면을 벗겨내 진실을 알리고 전쟁을 피하도록 최선을 다할 필요가 있다.(170)”라고 주장했다. 그람시의 글에서는 전반적으로 매우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사회주의자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한편 대중을 계몽하고 사회 변혁을 일으키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의 열정도 고스란히 느낄 있다. 반면 (불공평하긴 하지만) 지금의 관점에서 그람시의 사상을 고려하면 비판할 만한 점도 많을 것이다. 사회의 문제점 내지는 현상을 과연 계급의 문제로서만 파악하고 평가할 있을까? 다른 설명 방식도 분명히 존재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민중은 우매하고 계몽해야한다고 보는 관점도, 현대 사회에서야 교육 기회의 확대가 이루어졌으나, 그람시의 시대는 분명 절실하고 중요한 문제였을 것이다.   

      전쟁과 자유에 대해: 1914년에 발발하여 1918 11월에 끝난 세계 1 대전은 4 군인만 1000 명이 사망하고, 2000 명이 넘는 군인들이 불구가 되거나 부상을 당했던 인류 역사상 인명 물적 피해가 어마어마한 전쟁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이탈리아는 승전국 나라였음에도 전후 보상을 거의 받지 못했다고 한다. 결과 전쟁을 통해 경제가 부흥한다 일반적인 믿음과는 달리 이탈리아의 경제 상황은 상당히 악화되어 가고 있었고, 시대적 상황하에 1922 10 무솔리니가 파쇼단을 이끌고 로마 행진 성공적으로 이끈 , 파시스트들이 권력을 장악하는데 배경적인 도움이 되었던 것으로 있다. 김현우의 저서 <안토니오 그람시>에는 당시 무솔리니 세력의 영향력이 어떠한지 단서가 나와있다. 퇴역군인과 소상인, 소농의 자제들로 구성되었다고 하는 파쇼단은 국가권력과 독점자본가 집단의 비호 아래 민중들과 사회주의 세력에 대해 무법적인 린치와 방화를 가했다. 1920 5월에 3 명에 지나지 않았던 파시스트 세력이 1922 10월에 이르러서는 30 명으로 성장했다.’ (30) 이와 관련하여 그람시는 전쟁은 모든 위선적이고 상징적인 추상성이 자연적으로 결합된 화학작용이며, 과정에서 모든 민족주의가 만들어진다.”(174)라고 대목은 이런 시대적인 분위기를 염두해둔 하다. 이러한 사회분위기에서 파시스트 정부에 의한 언론의 검열은 당시 매우 엄격했던 것으로 보인다. 검열에 대해 그람시가 말한 대목은 의미심장하다. “검열제도를 운용한다는 것은 언론에서 중국인들의 자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허용하지만, 이탈리아인의 자유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삭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의 자유가 그들 체제에는 위협적인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 중국에서 각종 SNS 구들과 같은 종합 검색 사이트를 차단하고 있는 것을 보면, 수긍이 가면서도 아이러니하다.

     책의 말미에 보면 하원에서 결사와 조합설립 관해 그람시와 무솔리니가 나눈 대화의 일부가 등장한다. 일부분이긴 하지만, 그람시를 공격하는 무솔리니와 여러 의원들의 근거가 희박한 논리에 비해 그람시의 지성이 더욱 드러난다. 하지만 결국 그람시는 무솔리니와의 대결에서 패배하고 결국 20 4개월 형을 받아 수감되게 된다. 그러던 널리 알려져 있는 <옥중수기> 남기고 11 째인 1937 사망하게 된다. 아마도 그람시는 우리 나라에 많이 알려져 있는 공산주의 이론가는 아닐 같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혁명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으로서 마키아벨리 읽고 있으며, 그람시는 <옥중수기>에서 수차례 마키아벨리 언급하고 있다고 한다. 이론의 답습을 넘어 그람시는 현재 우리에게 어떤 가르침을 있을까. 앞으로 그람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면 이러한 방향을 좀더 염두해두고 고민하게 것같다.    

     그람시는 자신이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했고 살아있는 사람은 삶에 참여하는 사람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람시에게 무관심한 사람 자신의 삶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이며 따라서 진심으로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는 듯하다. ‘증오라는 단어를 쓰면서까지 무관심을 증오한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당신 자신의 삶에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라!’라는 강렬한 메시지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책은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 <참여하라> 같은 호소의 100 버전이라 있다. 그람시는 오늘날 우리는 타인의 무능함을 방치하고, 현실을 외면하고 주변 상황과 사회 부조리에 눈감은 잘못에 대한 죗값을 치르고 있다.”(50)이라고 언급했는데, 이러한 문제의식이 바로 우리가 필요한 부분이 아닐까. 한가지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면, 우리가 선거철만 되면 선거를 해야한다고 떠들지만, 선거에 참여한 사람들도 선거 이후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견해를 표출하거나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 얼마나 것인가. 정치인들은 국회의원이라도 당선되면, 선거 운동 당시 걸었던 공약은 모두 잊는 모양이다. 시민으로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인간답게 지켜내기 위해 시민으로서의 목소리를 내고, 국회의원들 정치인들의 활동을 주목하고 견제해야만 한다. 우리가 다시 무관심 속에서 지내게 때가 바로 우리의 삶이 또다시 정치인 자본가들이 구축해놓은 시스템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일이 반복되는 것이다. 이에 <나는 무관심을 증오한다>에서 그람시는 시민으로서 우리 각자가 정치적인 것을 그람시는 의도하고 있다고 나는 이해한다. 여기서 정치적인 이란 쇼리스의 <희망의 인문학> 나오듯, ‘ 인간으로서 자신의 인간적인 삶을 스스로 지킬 있는 으로서의 정치적인 이며, 이를 위해 자신의 삶에 직접 관심을 갖고참여하라라는 것이 그람시의 의도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나는 무관심을 증오한다 그람시의 외침은 우리가 진실로 살아있는 삶을 살기위해 각자가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라고 일깨우는 목소리 것이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도시에는 이방인도 있다. 그러나 진정으로 살아있는 사람들은 시민일 수밖에 없으며, 무언가를 지지하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 무관심은 무기력이고 기생적인 것이며 비겁함일 뿐 진정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무관심한 사람들을 증오한다."(27면)

"나는 살아 있고 삶에 참여하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나는 삶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을 증오하며, 무관심한 사람을 증오한다."(32면)

[파업 투쟁에 참여해 패배한 피아트 노동자들에 대한 변론과정에서]

"오늘날 우리는 타인의 무능함을 방치하고, 현실을 외면하고 주변 상황과 사회 부조리에 눈감은 잘못에 대한 죗값을 치르고 있다."(50면)

[검열제도에 대해]

"검열제도를 운용한다는 것은 언론에서 중국인들의 자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허용하지만, 이탈리아인의 자유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삭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먼 곳의 자유가 그들 체제에는 위협적인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119면)

[공무원을 비론한 관료에 대한 비판]

"더 중요한 사실은 공무원들이 국가 안에 자신들만의 국가를 건설하였다는 점이다. 그 국가는 공무원들의 비이성적이며 비인간적이고 무책임한 전횡을 통해 시민들을 억압하면서 만들어낸 것이다."(142면)

"이탈리아 민족의 통일에 대한 일상적 연대기를 시와 낭만적 서술로 다소 무리하게 꾸민다는 것은 아직 우리 역사를 제대로 쓰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150면)

→ 우리의 역사 서술은 현재 어떠한가 생각해볼 수 있겠다.

[`전쟁을 반대한다`에서]

"부르주아라는 특권 계급의 특권을 유지하고 누릴 수 있도록 만든 경제적 형태가 바로 자본주의다."(162면)

"전쟁은 자본주의 국가간에 상시적으로 발생하는 갈등으로 언제든 발발할 수밖에 없다."

"경제 전쟁을 위해 무역보호정책을 요구하는 산업계의 경영자들과 군수산업의 고용인들 그리고 공포 유포자들의 음모를 피하면서, 모든 가면을 벗겨내 진실을 알리고 전쟁을 피하도록 최선을 다할 필요가 있다."(170면)

"전쟁은 모든 위선적이고 상징적인 추상성이 자연적으로 결합된 화학작용이며, 이 과정에서 모든 민족주의가 만들어진다."(174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로운 계급투쟁]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새로운 계급투쟁 - 난민과 테러의 진정한 원인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희상 옮김 / 자음과모음 / 2016년 3월
평점 :
절판


<새로운 계급 투쟁>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희상 옮김 | 자음과모음

 

다재다능한 영화배우이자 영화제작자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여배우 줄리 델피가 각본을 쓰고, 출연까지 영화 <2Days in Paris>에서 프랑스 여자로 나오는 줄리 델피의 역은 뉴욕에서 일하고 있는 미국인 남자친구에게 파리에 테러는 없어!(No terrorism in Paris)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영화에서 대사가 사용된 맥락은 뉴요커인 남자친구에게 파리는 뉴욕보다 훨씬 안전하다는 의미에서 사용했던 것인데, 이제 2015 11월에 일어난 파리 테러 사건을 보고 줄리 델피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번에 읽게 슬라보예 지젝의 <새로운 계급 투쟁> 지금으로부터 불과 6개월 전에 일어난 파리 테러사건을 기반으로 하고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하루가 멀다하고 폭탄테러가 일어나곤 했던 파키스탄이나 탈레반 점령지역에서 일어나는 폭력적인 사건의 모습도 마찬가지로 충격적이고 폭력적인 현장이었을 테지만, 아주 예외적으로 테러가 일어나리라 생각하기 힘든 프랑스 파리에서, 그것도 대중문화가 소비되는 현장에서 예고없이 벌어졌기에 충격이 더욱 컸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뉴스를 통해 전달되는 파리 테러의 상황을 보며 충격받고 있는 나에게 지젝의 책을 읽은 지금, 내가 얼마나 편중된 기사와 제한된 정보로 세상을 들여다보고 있었는지 다시금 깨닫게 해주고 있다.

     언젠가 칼레드 호세이니의 < 개의 찬란한 태양> 고통스럽게 읽으면서 특히 기억나는 대목이 있었는데, 주인공 소녀가 잠시 집을 비운 사이 집에 폭격을 맞아 소녀의 앞에서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장면이었다. 소설은 읽는 내내 너무나 고통스러움이 느껴졌던 소설이었는데, 다시금 생각해보면 나의 조부모님 세대가 실제로 겪었던 전쟁의 소용돌이 모습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인의 아버님께서는 한국전쟁 당시 미군기의 폭격을 맞아 대가족이 거의 한순간에 눈앞에서 사망한 분도 계시고, 북한군에 의해 부모님과 가족을 잃은 교수님도 계셨다. 지금도 어느 나라, 어느 지역에서는 이러한 폭력이 난무하고, 당장 내일을 기약할 없는 환경에 처한 가족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드물게 일어난 파리 테러를 매일 같이 테러가 일상화된 곳과 굳이 비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러한 폭력이 지금도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으며, 우리는 얼마나 제한된 정보에 접하고 있는지를 다시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는 말이다.

     2015 11월에 발생했던 파리 테러에 대한 지젝의 견해는 , ‘난민과 테러는 모두 기본적으로 글로벌 자본주의의 결과이고, 이러한 문제들의 바탕에는 (새로운 양상의) 계급투쟁이 존재한다. 점이다. ‘글로벌 자본주의라는 용어는 익숙하지 않지만, 읽어나가다보면 신자유주의적 가치관에 기반한 자본주의 맥이 닿는다. 지역을 초월하여 전세계의 경제적 장벽을 철폐하고 무한 경쟁의 플랫폼으로 만들어버린 자본주의를 의도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자본주의는 세계화’, ‘사유화’, ‘현대화라는 이름에 가려진 획일화’, 좀더 구체적으로 ‘(기업을 위한) 적은 세금’, ‘ 적은 규제’, ‘보조금 삭감등의 구호를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이미 20세기 중반부터 전세계에 손을 뻗치기 시작했는데, 이제와서 지젝은 글로벌 자본주의 언급하고 있는 것일까 의문이 들긴한다. 지젝은 지붕 모든 것을 장악한 잔혹한 폭력이라고 묘사한 글로벌 자본주의 정치에 그치지 않고 인종, 종교 그리고 섹스에까지 폭력성을 전파하고 있다고 일갈한다. 여기서 지젝이 의도한 섹스 남성에 의해 여성에게 자행되는 폭력 성차별에 기반한 폭력 일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한다.

     그럼 시점에서 궁금해지는 것은, 그렇다면 과연 글로벌 자본주의 난민과 테러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하는 점이다. 지젝이 말하는 단서는 콩고에서 일어난 부족 분쟁의 배우에 상징적으로 집약되어있다. , ‘부족 분쟁으로 치장된 싸움의 배후에 글로벌 자본주의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 군벌 지도자들은 각자 외국기업과 연결되어 있고, 외국기업들은 이를 이용하여 콩고의 천연자원을 앞다퉈 착취하려고 혈안이 되어있었다. 난민의 경우, 이러한 글로벌 자본주의의 영향으로 공권력이 무너진 국가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달리 바라보면, 글로벌 자본주의의 영향으로 시스템의 내부에서 보호받는 계급 보호권 바깥에 있는 계급(멀리 떨어진, 폭력으로 얼룩진 나라의 사람들)’으로 분리되어 버렸다. 지젝은 전세계적인 새로운 계급 분리현상을 새로운 아파르트헤이트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이는 사실상의 노예제의 체계적 확산에 다름 아니다라고까지 진단하고 있다. 다시 난민 문제와 연관지어 보면, 이러한 글로벌 자본주의의 동력을 바탕으로 미국과 유럽으로 대표되는 서구의 군사개입이 결정적으로 난민을 발생시키고 있는 주요 원일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지젝은 책에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난민과 테러에 까지 맥을 추적하여 연결시키고 있다.

     영국 로더럼에서 발생한 사건을 언급한 대목을 읽으면서, 나는 우리의 상황을 떠올려보게 되었다. 하나는 국제결혼의 증가로 인한 다문화 가족의 꾸준한 증가, 그리고 남한에 정착하게된 탈북민들의 현실이 번째이다.   <결혼원정기>라는 영화가 나올만큼 대한민국 노총각들의 결혼 상황의 일부를 한동안 보여주는가 싶더니, 이제는 젊은 남녀 세대의 성별을 불문하고 백인이 배우자인 국제결혼이 주변에서 부쩍 많아지고 있는 듯하다. 물론 과거보다는 국제결혼의 양상이 매우 다양화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굳이 나누자면 배우자가 아시아 인과 백인의 크게 가지 경향을 생각해볼 있겠다. 어떤 이유인지 납득하기 어렵지만, 배우자가 아시아인인 다문화가족의 아이들이 백인이 배우자인 다문화가족의 아이들보다 분명하게 놀림을 받거나 차별적인 시선을 많이 느끼지는 않을까. 그리고 이런 경향이 세월이 좀더 지나고 더욱 굳어져서, 영국 로더럼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해 지젝이 언급한 것처럼 이데올로기적 틀이 형성되어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가 생긴다.

     한편 탈북민들이 부대껴야하는 현실은 다문화 가족이 안고있는 어려움보다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같은 민족임에도 너무나 자본주의화되어 있는 남한에서 정착하는 일은 쉽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특히 탈북민이 정착하도록 정부와 기업에서 지원하던 사업도 해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고 하며, 아이들의 학교 자퇴율 혹은 중도 탈락률이 매우 높다는 기사를 언젠가 본적이 있다. 다문화 가족의 서로 다른 유형화 양상을 통해, 그리고 탈북민들의 남한 정착과정에서 겪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영국 로더럼에서 자신이 사회로부터 소외되었다 느낄 청소년 집단이 앞으로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있겠는가?

     한가지 책을 읽으면서 떠오른 생각은 니시다 료스케의 저서 <무업 사회> 읽으며 알게된 일종의 히키코모리생활을 하는 경제적 난민또한 세계화 지구촌에서 주목해야할 새로운 계급이라고 있겠다는 점이다. ‘신자유주의적가치를 그대로 보여주는 자유무역협정 체결한 이후, 외국 기업, 특히 세계 은행과 국제통화기금의 영향력을 앞장서서 실천하는 기업들이 전세계에 침투하여 만들어내는 경제 난민 일본이나 우리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문제도 세계적으로 획일화, 패턴화 충실히 따라가는 모습을 있다. 인도의 환경 운동가 반다나 시바의 <물전쟁>에서는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의 지원을 업고 인도에 들어온 서양의 다국적 기업이 새우 양식 물산업으로 전통적인 지역사회가 파괴되고 지역 주민들이 난민화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패턴은 이제 글로벌 자본주의 폭력 아래 세계화 문제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한미FTA체결 이후, 농업투자 보조금 삭감 선진국 농산물의 수입으로 인하여 많은 농민들이 타격을 입었다. <물전쟁>에서 난민화된 인도인들처럼, 우리의 농어민들도 농어업의 글로벌화 인하여 많은 농부들이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고, 앞으로도 더욱 어려울 것이다. 농어민의 난민화 문제이지만, 나라의 식량 확보와 관련한 문제를 외국의 기업에 의존한다는 것처럼 위태로운 상황은 다른 문제의 씨앗을 안고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새로운 양상이 기존 사회의 유행을 대체해버리면, 그로부터 영향을 받는 새로운 계급 존재할 것이고, 이러한 현실은 반드시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지젝이 의도하는 것에서 너무 벗어나지 않았는지 모르겠으나, 결국 글로벌 자본주의 의해 어떤식으로든 영향을 받는 새로운 계급이 맞아야할 투쟁이 바로 이러한 문제이다. 지젝이 무엇이 그리고 누가 난민을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만들었는지 생각해야한다라고 언급하고 뒤이어 3세계 국가들의 식량위기가 농업의 글로벌화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라고 덧붙이는 대목을 보면, 결국 반다나 시바가 <물전쟁>, <누가 세계를 약탈하는가>에서 지적한 바대로 인도의 농어민 아니라 인도 국민이 안고있는 식량위기 문제는 지젝의 주장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고 봐야한다. “세계의 식량위기를 야기한 것은 우리 서구사회다!” 클린턴이 식량 문제에 관해 언급했다는 한마디는 지젝이 의도한 핵심을 지적하고 있다.

     다시 정리해보면, 책에서 글로벌 자본주의 표현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파급효과가 어디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있으며, 우리는 어떠한 세계에서 살고 있는지를 피부에 닿는 예를 통해 통찰하고 거시적 안목에서 간결하게 지적하고 있다. 당장의 경제 활동에 미치는 파급력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이라는 대지에 어떠한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넘어,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지 평범한 우리로서는 하나의 줄기를 잡아내기 힘들다. 더불어 다시금 느끼게 되는 점은 우리가 이제는 정신적, 심리적으로 잇닿아있다는 점을 넘어서서 네트워크라는 무형의 존재에 의해 물리적으로 구속되어있다고 느껴진다는 것이다. 개개인은 하나의 정보로서 존재하고 정보가 각자의 정체성으로 되어버린 듯하다. 온라인으로 연결되어 있을 때라야 우리는 비로소 존재증명을 하게된다. 사람이란 존재가 지구라는 게임판에서 하나의 상품가치를 갖게된 존재로 느껴진다. 그리고 지젝은 여기에서 나아가, 시장성을 갖지 않고 도태된 사람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새로운 계급이 글로벌자본주의 영향력 아래 새롭게 탄생하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며 다음과 같이 반문하고 있다.글로벌 자본주의의 새로운 시대는 노예제의 부활이라는 서막을 열고있는 것이 아닐까?”(62) 현재 나와있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서가 관심을 갖는 공통적인 문제점들 이외에 지젝이 지적하는 난민 문제, ‘테러 문제는 사실 별개의 사건과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지젝은 이렇게 개별적인 현상들을 놓고 이면의 근본적인 원인을 추적하여 낱개의 현상들을 하나의 줄기로 묶어 낸다.      

     저자는 새로운 계급 투쟁 다시 철저하게 바라보고 이를 수행할 주체는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말과 함께, ‘세계적인 연대의식 반드시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물론 지젝이라고 해도 거대한 시스템적인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해법을 내놓는 다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지젝 자신도 이러한 주장에 대해 이런 세계적인 연대는 유토피아일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실제로 패배할 것이고, 패배함이 마땅하다.’(117)라고 책의 방점을 찍고 있다. 다소 무성의한 결말로 보일 있겠으나, 비교적 간결하게 지젝 자신의 견해를 정리해 놓은 책은 구체적인 문제의 해결책을 고민하는 의도라기 보다는 우리에게 생각거리와 질문을 던지는 역할을 하고 있다. 다만, 짧은 나의 지식과 제한된 정보로 판단하자면, 지젝이 난민 문제에 대한 해법으로서 진보좌파와 대중영합주의자들의 견해를 모두 비판하는 대목에서는 좀더 시원하게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 아마도 나의 이해부족일 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양측을 비판하고 제시하는 의견이 과연 새로운 것인지 혹은 진보 좌파의 견해와 분명히 차별이 되는 것인지 의문을 가지게 된다. 하이데거 철학의 과거와의 대결이라는 개념을 언급하며 단순히 변증법적인 구조를 따르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결국에는 지젝이 비판하고 있는 진보 좌파의 견해와 대동소이한 것은 아닐까하는 의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된다. 이러한 부분은 지젝의 철학에 대해 좀더 알게 되면서, 그리고 저자의 주장을 좀더 생각해보면서 실마리를 찾을 있으리라 기대해본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10면)
"글로벌 자본주의는 전 세계에 철저한 계급 분리를 선포했다. 이로써 내부 영역에서 보호받는 계급과 그 보호권 바깥에 있는 계급(멀리 떨어진, 폭력으로 얼룩진 나라의 사람들)으로 분리되었다."


(24면)
"서구 생활방식을 뒤흔들고 있는 진짜 위협은 이민자가 아닌 글로벌 자본주의의 동력이다."

(64면)
"새로운 아파르트헤이트, 사실상의 노예제의 체계적 확산은 참사가 아닌 글로벌 자본주의의 구조적 필연성의 결과다."

(107면)
"난민은 글로벌 경제의 대가다."

(76면)
"우리의 실질적 과제는 오히려 ‘우리’와 ‘저들’ 노동자 계급 사이에 가교를 구축하여 연대 투쟁을 하는 것이다."

(93면)
"휴머니즘을 지향하는 보편성을 남에게서 나를 보는 인간적 보편성이다. 즉 정치적-종교적 기호와 무관하게 우리 모두가 하나이며, 우리 모두 동일한 두려움과 열정을 공유하는 존재임을 ‘아는’것이다."

(100면)
"난민이 우리와 다를바 없이 조바심을 내고 폭력적이고 요구하는 것이 많은 인간인데다 우리가 당연히 여기는 많은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문화에서 온 사람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바로 그래서 우리는 난민과 인도적 동정을 한데 묶는 연결고리를 끊어야 한다. 난민을 도우려는 자세는 그들이 겪는 아픔에 대한 동정에 뿌리를 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돕는 것이 의무이기 때문에 도와야 한다."

(109면)
"이런 혼란기에는 국가주권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재고하여 새로운 차원의 세계적 협력을 구상하는 것이 중요하다. ‘만인에게 평등한 이주의 자유’라는 애매한 용어가 아닌 정교하게 계획되고 잘 조직된 변화과정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유럽은 자신의 의무를 자각하고, 난민의 인간적 생존에 필요한 수단을 제공해야 한다. (…)가장 어렵고 가장 중요한 과제는 난민 이동 발생의 조건을 제거할 철저한 경제 변혁이다. 난민의 주 원인은 글로벌 자본주의와 그 지정학적 게임이다."

(117면)
"이제 우리는 계급투쟁을 다시 의제로 삼아야만 한다. 이를 수행할 유일한 길은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자들의 세계적 연대를 강조하는 것뿐. 이런 전체적 시야 없이 파리 테러 희생자들과의 비장한 연대감은 윤리의 가면을 쓴 모욕에 지나지 않는다."
"아마도 이런 세계적인 연대는 유토피아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실제로 패배할 것이고, 패배함이 마땅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