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찾은 : 시간 - 프루스트의 서재, 그 일년의 기록을 통해 되찾은 시간
박성민 지음 / 책읽는고양이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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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찾은:시간>

박성민 지음 | 책읽는고양이

 

 

[금호동 서재지기의 창업과 1년 간의 일기]

 

손에 감기는 아담한 한권을 손에 넣었다. 책의 저자는 서점 주인으로서 소규모 독립출판물 중고도서를 판매하는 서점 루스트의 서재주인장이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장편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제목에서 영감을 얻은 책의 제목과 서점의 상호는 저자를 닮은 서점의 성격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듯하다.

 

 

기억으로 거의 20 금호동에 고구마라는 중고서점이 있었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차례 교과서나 인문과학서적을 구하곤 했던 서점이었는데, 내가 가본 중고서점 중에서 규모가 가장 컸던 중고서점이었다. ‘고구마 보유하던 책이 당시에 20 권이 넘었으니까. 요즘 인기있는 알라딘 중고서점이 보유하는 수가 평균 3-4 권이라고 , 알라딘 중고서점 매장 5-6 점에 해당할 만큼 많은 책이 있었다. 당시 고구마 마침 중고서적의 온라인 검색 시스템을 시도했던 곳이었다. 온라인 검색 시스템으로 책의 존재를 확인했다고 해도, 실제로 책을 찾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날씬한 사람만이 지나갈 있었던 책장 사이의 더미들, 복도에 수직으로 쌓인 책을 뒤적뒤적하며 먼지를 털어내고, 마른 기침을 하며 책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이런 헌책방이 많이 사라져서 서점의 오래된 책냄새를 맡을 있는 곳이 많이 남아있지않다. 물론 깨끗한 중고서점이 편하고, 검색도 편하지만 원하는 책을 찾았을 때의 기쁨은 이와 비교하기 힘들다. 그리고 이런 고전적인 헌책방에서 책을 구하면 종종 누군가 어느 가을 낙엽을 주워 책갈피에 넣어둔 팔았는지, 마른 나뭇잎이 들어있었다. 누군가 책의 여백 곳에 메모해둔 흔적, 누군가에게 선물로 주면서 말로하기 멋쩍은 마음을 글로 표현해둔 메모를 년이 지난 타인이 발견하고 미소를 짓게 되는 일은 오랜 헌책방이 아니면 이제는 경험해보지 못할 일이 것이다.

 

 

 

갑자기 이렇게 오랜 기억을 더듬어본 이유는 90 , 저자도 역시 헌책방 고구마에서 점원으로 책을 정리하며 일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언젠가 그와 나는 각자 찾는 책을 찾느라 분주히 서로를 지나쳤을 것이다. 같은 시기에 분명 고구마라는 헌책방에 있었을 것이다. 저자는 고구마 이전을 하면서 서점을 관두고 대형 서점에서도 여전히 책과 관련한 일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 간의 준비를 마치고, 오래 살던 금호동에 '프루스트의 서재'라는 책방을 열었다는 것이다. 나는 주인장을 처음 보고 고구마 듣는 순간 오래동안 소식을 듣지 못했던 친구의 안부를 전해 들은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2015 1월에 서점 문을 처음 열고 1 간의 일기를 이번 <되찾은:시간> 모아 책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일기쓰기를 자신의 안부를 묻는 이라 말한다. 월세를 내고 14,500원의 순이익이 남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다음에 많이 팔아야겠네하며 격려해주던 젊은 날의 서점주인을 떠올리는 저자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달되어온다. 주인장의 글쓰기는 화려하거나 산만하지 않다. 간결한 표현 속에 정제된 생각을 고스란히 담아 드러내는 것만 같고, 사람에 대한 따뜻한  그의 글과 마음 씀씀이에 호감이 간다. 저자는 아직 개발이 늦은 동네에 조그마한 책방의 문을 , 오히려 책방의 운영을 걱정해주고, 비가 오면 내놓은 책을 비닐로 덮어주거나, 꽃을 놓아두고 가는 이들을 발견한다. 이런 사람들이 지키는 마을은 마음의 여유야 인간미가 있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파트 경비원한테 막말을 하고, 심지어 자살로 까지 몰아간 강남의 어느 동네를 떠올려보면 아직 이러한 마음씀씀이가 있는 동네가 남아있다는 것을 다행이라 생각한다. 동네에 조그마한 책방을 열고 생존하려고 부단히 노력하면서도 사람들과 소통하려는 저자의 고민들이 진솔하게 책에 담겨있다. 저자는 2015 서점을 열기 , 그리고 열고 1 동안, 아니 지금까지도 자신이 뛰어든 서점의 가치, 존재 이유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해왔을 것이다. 자신이 준비한 '프루스트의 서재' 존재이유를 주인장은 다음과 같이 말한.

 

 

나는 헌책과 새책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잊혀지거나 잊혀질 생각과 기록의 가치를 다루는 것이다. 점이 중고책과 독립 출판물이 공존하는 프루스트의서재 존재 이유다.”(63)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분명한 생각을 견지해나가려는 저자의 노력과 다짐을 느낄 있었다.

 

 

 

<되찾은:시간>에는 서재 주인이 지난 2015 1 침묵 속에서 남겨둔 기록을 보여주고있다. 단편들이긴 하지만, 일관된 저자만의 생각과 고민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책을 매개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이들의 사연을 듣고, 자신의 생각을 풀어놓는 공간이 되어가는 같아 다행한 마음이 든다. 나라의 인구 절반 가까이가 대도시에 모여살며 파편화되어가는 삶을 살아가는 현대 도시인들에게 우리는 원래 서로 잇닿아 있는존재임을 끊임없이 상기시켜주는 일을 이런 공간과 사람들이 해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존재임을 깨닫고, 서로의 연대 재확인하는 일이 앞으로 필요한 일이며 과제가 같다. 서울의 서쪽 신촌, 홍대 주변에서 이러한 작은 서점이나 공방이 모여 새로운 마을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면, 금호동과 같은 서울의 동편에 프루스트의서재 같은 작은 서점들과 공방 등이 새로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책을 덮으며)

저자는 오늘도 자신의 안부를 묻는 일기를 썻을 것이다. 말주변은 없을지 몰라도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일을 좋아한다는 그의 나직하고 정제된 문장을 떠올려보며, 저자의 서재가 운영되기를 바란다. 책을 읽고 덮으니 표지에 그의 조용하고 차분한 목소리를 닮은 정제된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책은 사람을 이어준다.

 

 

결국 책이란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사물이므로 사람을 이어주는 책이야 말로 기능을 다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되찾은:시간> 서점 곳을 알게해준 책뿐만이 아니라, 서재지기와 다른 사람들을 이어줄 것이다. 조만간 주인장의 안부를 물으러(사실 그가 내려주는 커피 얻어마시러) ‘프루스트의 서재 다시 들러볼 예정이다.

 

 

 

 

 

 

 

"나는 헌책과 새책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잊혀지거나 잊혀질 생각과 기록의 가치를 다루는 것이다. 이 점이 중고책과 독립 출판물이 공존하는 ‘프루스트의서재’의 존재 이유다."(63면)

"책은 사람을 이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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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 세계를 굴리다 - 바퀴의 탄생, 몰락, 그리고 부활 사소한 이야기
리처드 불리엣 지음, 소슬기 옮김 / Mid(엠아이디)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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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바퀴, 세계를 굴리다>

(원제 The Wheels: Inventions & Reinventions )

리처드 불리엣(Richard W. Bulliet) 지음 | 소슬기 옮김 | MiD출판사

 

 

바퀴달린 이동수단의 가장 오래된 흔적은 기원전 4000 경에 남겨졌다.

(148)

실증적인 1 증거물들에 매달리는 고고학자들과 역시 1 사료에 기반하여 역사학자들은 이와같은 평가를 내린다. 리처드 불리엣은 역사가로서 바퀴라는 대상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며 추적해나가는 역사 탐정과 같은 인상을 준다. 독자는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며 고고학자 내지는 역사 탐정이 것처럼 저자의 시선을 따라가게 되는데, 과정을 따라가는 일이 줄곧 흥미를 자극했다.

 

 

 

(바퀴를 바라보는 가지 형태)

저자가 정리한 가지 형태의 바퀴는 바퀴를 잇는 축과 바퀴가 일체형을 이루어 같이 돌아가는 바퀴 형태인 윤축(wheelset)’, 바퀴가 독립적으로 돌아가는 독립차륜(independently rotating wheel)’, 그리고 캐스터(caster)’라고 하는 수직축과 수평축을 통해 바퀴가 보다 자유도를 가지고 움직일 있는 바퀴가 있다. 역사적으로 윤축을 적용한 사례는 광산에서 사용되어 무거운 석탄 등을 나르던 광차 기차가 예일 것이며, 독립차륜은 마차바퀴, 자동차 바퀴를 연상하면 된다. 이에 더하여 윤축 형태의 바퀴보다 다소 늦게 그러나 거의 비슷한 시기 동안 인기를 누린 바퀴의 형태는 바로 독립차륜방식의 바퀴로서 역사상 가장 보편적인 바퀴의 형태를 이루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앞의 바퀴 형태와는 달리 캐스터’는 가구 이동용 바퀴처럼 개의 수직회전축과 개의 수평회전축을 가진 바퀴의 형태로서 비교적 짧은 역사로서 1700년대 이후에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저자의 설명대로 바퀴의 형태를 크게 부류로 나누고 나니 길을 가다가도 무심히 유모차는 독립차륜이라는 생각이 반사적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11개의 중에서 캐스터 관한 장은 마지막 11장에 간단히 언급되므로 사실상 <바퀴, 세계를 굴리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윤축 독립차륜 형태의 바퀴와 관련한 사항에 거의 모든 에너지를 집중하고 있다.

 

 

 

(심리전의 중요한 요소로서의 이륜전차)

언젠가 이집트 파라오의 전차(Chariot) 주제로한 다큐멘터리 영상을 기억이 있다. 학자들과 과학자들이 현재 남아있는 유물과 기록들을 토대로 실제 파라오의 전차를 재구성하여 만들어내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였는데, 책에서 바퀴를 분류하는 기준으로 본다면 분명히 마리 말이 이끄는 람세스2세의 이륜전차는 매우 놀라운 기술의 집약체였다. 이제 책을 통해 이집트 파라오의 전차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가 기원전 1600-1200년이라는 것을 새삼 알게되었다. 저자에 따르면 당시의 전차는 당시의 전술에서 실용적인 쓰임 뿐만 아니라 적에게 그리고 아군에게 어떻게 보일지 고려한 심리적 전술의 하나로서 중요한 전쟁 무기였다는 점이었다. 사륜 마차 또는 수레와 달리 비교적 소형의 이륜 마차의 가장 장점은 방향 전환이 보다 용이해짐으로 인하여 전시에 빠르게 적진에 침투하여 치고 빠지는전술이 가능했다는 것이 학자들의 설명이었다. 다만 저자는 어느 시점에서 전차가 무용하게 되었는데, 이유는 바로 이륜 전차가 조그만 장애물이 있어도 진행에 지장을 받는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전차의 진행을 방해하고, 말의 발굽을 공격하는 장애물을 던져 설치함으로써 이륜전차의 실용성에 급격한 타격을 입히게 되었던 모양이다. 

 

 

 

(바퀴와 인간 사회의 상호작용)

바퀴를 주제하는 연구자들은 인류역사에서 바퀴의 중요성은 인정하되, 바퀴 자체만으로 인류의 삶이 획기적으로 변했다고 바라보지는 않는 듯하다. 다만 인간의 속에서 바퀴가 자체만으로 발전할 잇는 대상이라기 보다는 바퀴가 달린 수레나 마차가 지나갈 있는 길의 인프라 구축 또한 병행해야한다는 점이 먼저 해결되어야 했다. 기원전 3000 전에는 이미 장장 8000 km 이르는 실크로드가 유럽과 중국을 이어주는 대륙 내의 통로로서 활발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지역에서 비슷한 양상으로 기술이 발달해왔던 것은 아니다. 말이 끄는 수레가 주로 다니던 길에는 말발굽에 의해 길의 훼손되거나, 또는 기타 가축의 배설물이 쌓이는 문제가 있었으나 자동차가 발명되고, 좋아진 도로 포장으로 자동차가 더욱 빠르게 보급되자 동물의 배설물이 도로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하지만 현대의 우리는 차량의 증가로 인하여 빠르고 편리한 수단을 얻었지만 교통수단이 점점 빨라지고 규모가 커짐에 따라 오히려 교통체증과 교통사고 위험에 노출되게 되었다. 사상가 이반 일리치가 지적한바대로 현대 사회는 반생산성 특징으로 하는 사회로 되어버린 것이다. 이는 바퀴달린 운송수단이 사회에 간접적인 영향이라고 있을 것이다.

 

윤축을 기반으로하는 기차는 제한된 길인 선로를 따라 움직인다. 윤축을 사용하는 운송수단은 저자에 따르면 단위거리당 수직거리, 선회반지름의 제약이 따른다. 다시말하면 일정한 수평거리 수직거리의 변화는 동력이 필요한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다. 아울러 윤축에 기반한 운송수단은 독립차륜을 사용하는 수단에 비해 회전이 용이하지 않으므로 거리를 회전해 가야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윤축 운송수단의 제약이 현대의 풍경에 상당한 영향을 주게 되었다. 달리 표현하면 기차의 동력을 최소화하기 위해 낮은 언덕이나 산을 깎아 보다 평평하게 선로를 건설하는 경우를 있다. 이와 더불어 독립차륜 방식에 바탕을 두는 자동차의 발달과 빠른 보급으로 도시 내의 풍경도 새롭게 바뀌었음을 있다. 가지 바퀴의 방식에 기반한 운송수단은 인간의 수직적 환경을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수평적 환경도 변화시켰다. 다시 말하면 철도는 선로를 중심으로 양쪽의 세계를 나누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저자는 철도가 공동체를 둘로 갈라놓는 결과를 흔히 초래한다’(38)라고 까지 언급하고 있다. 결국 바퀴에 의존한 운송수단은 도시를 비롯한 우리의 삶에 분열적 생태계를 구축했다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동물이나 사람의 왕래를 우선 방해하고, 철로를 중심으로 쪽은 부유자들이 사는 지역, 다른 쪽은 극빈자들이 모여사는 지역과 같이 우리의 삶을 분열시킨 사례를 보여주기도 한다.   

 

 

 

(바퀴의 섹시즘 그리고 마차의 유니섹스화)

바퀴에 대한 역사를 더듬어 가면서 눈에 띄는 쟁점하나는 바퀴를 사용한 운송수단이 성에 따른 차별의 역사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에서도 끊임없이 조롱받는 기사계급의 시대는 어떤 시대보다도 두드러지게 성차별적 요소를 보여주는 같다. 기사계급은 여성을 보호한다는 명분아래, 사실은 여성 특히 상류층 여성을 억압하는 핵심 계급이 되었던 시대가 중세라고 수도 있겠다. 저자에 다르면 독립차륜방식이었던 마차는 진정한 남성(기사) 말을 타고 이를 호위하는 동안 여성들만의 으로 인식되었고, 마차는 쇠퇴하고 비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15-17세기 중반을 통해 마차혁명이 일어남을 여러 언급하고 있다. 이는 남성들에 의해 비하의 대상이 되었던 마차가 시기 이후 남자 귀족들에 의해 이용되면서 마차가 위상을 회복한 계기로 파악해볼 있다. 다시말하면 마차가 더이상 여성들의 전유물 되지 않고, 유니섹스화 되었던 계기로 이해해보면 어떨까. 

 

하지만 이쯤에서 나의 놀라움이 끝나지 않는다. 중세 유럽의 여성들이 처한 상황에 비해, 비슷한 시기 중앙아시아의 유목민 여성 받지 않았던 구속으로서 여성이 유목 민족 사이에서 고유한 역할 마을의 수레를 책임짐 수행하였다. 다시말하면 중세 유럽 여성들이 억압을 두드러지게 받게된 시기는 기사도의 흥행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중세 유럽 여성들(특히 귀족 여성들) 기사도와 중세 기독교의 억압에 받기 시작했다면, 중앙아시아 유목민의 여성이 억압을 받게 되는 계기는 산업혁명에 의해 진행되었다고 봐야할 같다. 나는 바퀴에 관한 마차혁명의 계기가 유럽의 흑사병 이후, 달라진 인본주의적 관념 또한 중세시대 여성들 만의 것으로 여겨지던 마차 타는 남성의 등장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은 로지스틱 곡선으로 대변되는 혁신의 전파 그래프에서 저자가 전하듯, 중세가 끝나던 시기의 마차의 출현 바퀴와 관련한 운송수단의 기술변화와 무관하다는 점을 재확인해준다. 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보다 중요한 관점은 유럽의 (상류층)남성이 바퀴달린 이동수단을 바라보는 태도/관점의 변화에 기인한다’(188) 하는 점이다. 이는 중세가 끝날 무렵 유럽에서 어떠한 종류의 세계관의 변화가 이루어 졌는가를 파악하는 것이 관건이다. 저자 리처드 불리엣은 이러한 배경에 주요한 영향을 끼친 요소로서 다소 엉뚱하게 화약무기의 개발에 관여한 헝가리 기술자를 언급하고 있다.

 

사실 나는 흥미롭게 읽어나가다가 저자의 주장을 만나니 지나치게 구체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없었다. 저자가 ‘1450-1650 사이에 유럽에서의 세계관에 어떤 변화가 있었나?’라고 물을 , 나는 엉뚱하기는 하지만 좀더 포괄적인 역사를 떠올려보았다. 나의 엉뚱한 생각은 유럽의 흑역사, 흑사병의 출현 닿았다. 근거로 유럽에서는 1340년대 흑사병의 유행으로 유럽 인구의 3분의 1 해당하는 2500만명이 사망했을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추정한다고 한다. 하나의 사건은 확고한 자리를 차지했던 신의 시대에 신의 권위에 대한 의혹을 조금이라도 품게 하지 않았을까? 마을이 흑사병으로 몰살당하고, 한명이 혼자 살아남았다고 가정해본다. 그럼 사람은 자신의 가족을 모두 빼앗아간 신을 원망하지 않을까. ‘흑사병 유럽에 미친 영향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흑사병의 유행을 거쳐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좀더 많은 확률적기회가 주어졌을 것이다. 이는 확률 기반으로하여 혁신의 전파 양상을 보여준다는 로지스틱 곡선 생각과 무관하지 않다고 믿는다. 보다 적은 생존자에게 보다 많은 기회와 빠른 사회의 변화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시기가 바로 흑사병이 잦아든 이후의 유럽이 아닐까. 

 

 

 

(바퀴와 오리엔탈리즘)

미국의 역사학자인 저자에게서 동양에 대한 편견을 읽어내었다는 것이 아니라, 나는 오히려 중동역사를 전공한 저자가 바퀴에 얽힌 솔직한 서양인의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을 재확인해본다. 중국의 외바퀴 수레 아니라 일본의 인력거에 대한 서양인의 반응은 혐오감이었다고 저자는 전한다. 아시아인으로서 나는 오히려 소가 끄는 수레를 주거지로 사용하며 마을을 구성하는’(168) 알란족훈족 (169), 그리고 몽고의 무자비한 침략을 받았던 유럽인들의 동방에 대한 뿌리깊은 두려움과 혐오의 연장선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다시말하면 유럽인이 인력거에 혐오감을 드러내었다라기보다, 유럽인의 뿌리깊은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이 혐오의 대상을 인력거라는 사물을 통해 드러내었다라는 것이다.

 

 

 

(마무리하며)

<바퀴, 세계를 굴리다(원제: The Wheels: Inventions & Reinventions)> 바퀴 달린 운송수단의 5500년의 역사를 독자에게 흥미롭게 보여준다. 책의 방점은 아마도 윤축 독립차륜사이에 벌어진 운송수단의 경쟁과 인간의 삶에 영향에 있다고 있겠다. 특히나 책에서 마차혁명이라는 개념은 가장 중요한 모티프일 것이다. 아마도 저자는 마차혁명 주로 염두해 두며 다음과 같이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고려요소들 사이의 여러 가지 상호 연관성을 분명히 하면서, 바퀴의 이야기는 발명이 누가 무엇을 처음으로 생각했느냐 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한다.”(260)

이와 관련하여 책의 부제가 발명(inventions) 그리고 재발명(reinventions)’이라는 점에 다시 주목해본다. 이렇게 부제를 붙인 저자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책을 읽고 보니, 기존의 것에 대해 새롭게 가치를 발견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겠다 싶다. 좀더 구체적으로 퍼즐을 맞추어보면 바퀴의 재발명이라는 것은 바퀴에 대한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게 마차혁명 심리적 성격을 더욱 설득력 있게 제시해주는 것으로 파악해도 것이다. 바퀴의 역사와 흑역사 살펴봄으로써 좀더 보편적으로 얻은 교훈은 우리 인류의 역사는 일종의 편견을 가진 지배자의 역사였다는 ,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편견을 깨고 변화해간 도전자의 역사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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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의 여자들 1 - 4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4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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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의 여자들>

콜린 매컬로 | 강선재, 신봉아, 이은주, 홍정인 옮김

 

 

풍부한 상상력과 세심한 고증의 결정체

나는 이번 기회에 처음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를 알게 되었다. 콜린 매컬로의 장편 역사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시리즈의 한 복판에, 기원전 1세기 로마의 현장에 나이키 운동화를 신은 내가 뚝 떨어진 느낌이었다. 토가를 입은 원로원과 집정관들의 모임에 불쑥 나타나서 카이사르와 키케로의 명연설을 듣고 논리적인 웅변에 감탄하고, 카이사르의 연설에 반대하는 피소가 머리에 피를 흘리면서 사람들에 의해 의사당 밖으로 끌려나가는 장면을 눈앞에서 보는 생생한 현장감을 느꼈다. 콜린 매컬로는 2000년이 지나 이름만 남은 이들이 살아숨쉬는 생생한 현장을 복원했다.

이렇게 비교하면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콜린 매컬로는 서양의 김용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다만 김용은 상상력에서 보다 큰 비중을 두었다면, 매컬로의 글에서는 작가의 상상력 뿐만 아니라 기원전 1세기 경, 로마인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생활사적인 디테일이 분명하게 살아 숨쉬고 있다. 로마 귀족 남성들의 욕망과 이들의 치밀하고 복잡한 정치적 권모술수, 그리고 로마 귀족 여성들의 또 다른 차원의 야망 - 예를 들어, 세르빌리아가 자신의 아들 브루투스에게 재산을 몰아줌으로써 또 다른 자신의 아바타로서의 생명력을 보장해두려는 욕망 - 의 현장을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전개해나가고 있다.  

지구의 반대편에서 2000년 전 벌어졌음직한 일들이 만약 지금 외계인이 침공하여 현대 사회를 관찰할 때 상당한 공통점을 발견할 것 같다. 물론 인간이 사용하는 부속물의 모습은 획기적으로 바뀌었지만, 사랑과 질투, 분노와 탐욕의 감정들이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인간으로부터 분리된 적이 있었던가. 앞에서 매컬로를 서양의 김용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물론 많은 차이점이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부각되는 점은 매컬로는 주요 인물의 캐릭터의 연구에 보다 많은 고민을 한 흔적을 여실히 보여준다. 영웅의 시대에 전장에서 벌어진 일이나 어떤 역사적인 사건의 현장에서 벌어졌음직한 일이 아닌 이들의 일상에 파고들어 이들의 심리를 치밀하게 상상하고 인물을 묘사하고 있는 점은 가히 탁월하다는 점에 그저 감탄하게 된다. 물론 역사 소설은 소설로서 읽어야 하겠으나, 새롭게 깨닫게 되는 것은 보편적인 인간 본성의 재발견이라는 점과 인간이 존재하는 언제 어디에서건 개개인의 일상은 여전히 끈임없이 지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카이사르의 여자들>에서 로마로 돌아와 우여곡절 끝에 최고신관으로 선출된 카이사르는 다음의 2권에서 법무관으로 선출되면서 한 걸음 더 정치적으로 성장할 것으로 보이는데 카이사르에게는 앞으로 어떤 시련과 승리가 전개될지 더욱 기대된다.

 

 

 

[첨언]

*지도에 대해 우선 책에서 몇 개의 지도 및 도면이 나오는 데, 너무 많은 정보가 있어서인지 글자가 작고 이탤리체로 기울어 있어서 가독성이 떨어진다. 로마자를 기본으로하는 언어에는 이탤릭체로 기울이는 방식이 쓰이긴 하지만, 우리 말의 사용에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방식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한편 지도가 나오면 찬찬히 구석구석 구경하는 걸 좋아하지만 눈이 좋지 않은 나로서는 개인적으로 지도를 살펴보는 일이 다소 피곤한 경험이었다. 혹시라도 다음 번 인쇄시에는 기울인 텍스트를 바로 세우고, 글자체를 바꾸어 가독성을 좀더 고려해주셨으면 한다.

*등장인물의 관계에 대한 언급 처음 매컬로의 소설을 접해서인지는 몰라도 수많은 인물들의 이름과 이들의관계, 등장 인물의 별명의 사용 등으로 이들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앞에서 읽었던 누구였는지를 더듬어 가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나처럼 기억력이 좋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주요 인물들에 대한 도식, 가족관계 등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게 첨가하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가져본다.

*번역에 대해 번역가가 4명 참여한 것은 일의 부담을 줄일 수 있는 장점이 있으나 문체의 차이로 인한 불일치, 어색함을 주기 쉽다. 복잡한 등장인물의 이름을 기억하려고 집중하며 따라가다보니 특별히 문체의 상이함을 느끼지는 못했다. 다만 작업의 부담이 줄어든 만큼 독자를 좀더 고려해주셨으면하는 부분이 있는데, 상당한 고증과 연구를 통한 역사 소설인 만큼, 그리고 다른 고대의 문화를 배경으로 하는 만큼, 독자를 고려하여 좀더 독자에게 다가갈 수 있는 추가 작업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예를 들어 기원전 1세기 경에 로마에서 사용하던 물건이 나오는 경우, 독자가 보다 접근하기 쉽게 간단한 주석을 덧붙였으면, 그 때 그 때 읽어가면서 좀더 이해를 깊이 할 수 있었을 것 같다. 또 다른 예로 화폐의 단위인 탈렌툼이 당시에 어느 정도의 가치를 가지는지 언급이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브루투스의 어머니인 세르빌리아가 아들에게 갈 수도 있었던 돈-그러나 이복동생 카이피오에게 넘어간 돈- 1 5천 탈렌툼이란 과연 얼마의 가치를 지니는지? 이 금에 비교하면 카이사르가 원로원에서 자신이 해적에 납치된 경험을 이야기하며 해적에게 납치된 사람들의 계급에 따른 몸값을 이야기하는 대목과 비교해보면, 카이사르는 법무관이나 집정관을 지낸 우너로원의 의원의 몸값은 50 탈렌툼, 유명한 감찰관과 집정관의 몸값은 100 탈렌툼하는 식의 정보를 건넨다. 이런 부분에서 역자들의 도움이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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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ress-activist susan SARANDON>
마크 샤피로(Marc Shapiro)지음 |  손주희 옮김  | 프로메테우스출판사



자신이 스스로 내린 결정을 고집스럽게 지켜내는 이 여배우는 그녀의 영화 <의뢰인><데드맨 워킹>이란 영화를 통해서 더욱 나에게 각인된 인물이었다. 다른 여배우들보다 좀더 '묵직하고 진지한' 주제를 다룬 영화에 출연한다는 인상만 가지고 있었는데, 수잔 서랜던에 대한 책을 보고 내가 받은 인상이 틀림이없음을, 그리고 독립적인 존재로서 자신의 양심적인 판단을 굳은 신념으로 지켜내는 인간을 알게되었다.


책을 읽으며 공감하거나 기억에 남는(분명 현재 나의 관심사에 부합하는 내용일 것이다)부분을 기록해본다.




"스무 살이라는 나이의 묘미는 질문을 던지고 화를 내고, 뭔가 바꾸고 싶어하고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는 데 있지요. 스무 살 적에 나는 아주 신비스럽고 영적인 데 빠져 있었어요. 그때는 정말이지, 추상적인 질문이나 직관적인 문제에 파고들 수도 있었고 모험을 감행할 수도 있었어요."(53면)


60년 대에 대학을 다닌 수잔 서랜던은 대학에 진학하기 전까지 사회적인 이슈에 대한 지식이나 관심은 일반적인 소시민들과 다들바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인간은 시대의 영향으로부터 무관하게 지낼 수 없듯이, 예술인으로서 사회에 자신이 사는 세계에 대한 감수성과 양심은 서랜던에게 큰 울림을 주었던 모양이다. 지금 우리의 20대는 질문을 던지고 분노할 줄 아는 이들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혹은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이라면 예술활동이나 해라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술인이야말로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직시하고 지적해야하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작품을 그럴듯하게 만들어내기 위해 어떤 '테크닉'에만 골몰하는 이들은 지성인으로서의 예술가가 아니라 기예만을 습득한 이들일 뿐이다. 예술가는 지성인으로서 사회에 대한 관심과 참여를 게을리하지 않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한 사람으로 위장된, 대통령이 되기 위해 뛰는 법인"

(257면)  

: 이 말은 미국의 정치인으로서 미국의 녹색당을 이끌며 공화당과 민주당의 허위와 부패상을 비판하던 랄프 네이더가 부시 전 대통령(부시2세)를 비판하며 언급한 말이다. 기업의 이익을 앞장서서 대변하는 정책을 펼쳤던 부시 2세가 대통령 입후보 행방을 보며 비판한 말이다. 최근에 선출된 도널드 트럼프에게도 잘 어울리는 비판이다. 


  

"그녀(서랜던)는 두 주요 정당이 미국 법인에서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하여 진심으로 마음을 쓰고 있는 사람들에게 모욕적인 일이라고 했다."(259면)


미국의 두 주요 정당인 공화당과 민주당은 모두 결국 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이라는 정체성을 간파한 수잔 서랜던의 통찰을 엿볼 수 있었다. 아울러 내가 막연히 하고 있던 생각과도 다르지 않아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어딘가에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서랜던은 의회정치가 모든 사회 경제적 지층을 포함하고 있다는 모든 웅변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2000년의 미국이 대부분 미국법인이 꼭두각시 조정자처럼 배후에서 조정하는 엄연한 계급사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261면)


: 번역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미국이라는 사회의 정체성에 대한 간결하고도 정확한 지적이다. 아울러 2001년 9월 11일에 있었던 "9.11테러"를 앞둔 시점이어서 더욱 섬뜩한 지적이다. 아울러 2008년 미국의 모기지 사태로 부터 발생한 세계 경제 불황과 월 가(Wall Street)에서 한 동안 이루어진 점거운동(OCCUPY Movement)을 예비하고 있다는 점에서 수잔 서랜던의 사회참여와 현실비판의식이 더욱 돋보인다. 


여기에 메모하지 않았지만, 수잔 서랜던의 삶 자체도 매우 래디컬한 인상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10살 이상의 연하 배우 팀 로빈스와 결혼하지 않고 평생의 반려자로서 살고 있는 모습에서도 그렇고, 팀 로빈스를 만나기 전 전설의 여배우 잉그리드 버그만처럼 여러 영화계 인사들과 연애을 한 궤적도 특이하다. 물론 많은 이들이 그러한 삶을 이해하지 못하고 비난할지 모르게지만, 나에게는 독립적으로 자신의 신념을 지켜나간 사람으로 보인다. 물론 필요한 경우 자신의 입지와 미디어를 이용하여 자신이 신념으로 지키는 가치를 위해 공공연한 자리에 나서서 연설을 하고, 정치적인 견해를 전달함으로써 사회의 변화를 이루는 데 동참하는 그녀의 삶은 역자가 밝히고 있듯이 내가 닮으려고 노력하기에는 힘든, 어쩌면 불가능한 삶이다. 하지만 그러기에 오히려 나는 오로지 나 자신의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견해를 찾고 이를 추구하면 되지 않는가라는 결론을 내려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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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호 특이점 - 정규 2집 바람 불면
최성호 특이점 연주 / 미러볼뮤직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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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재즈를 잘 모른다. 조금 안다고 하기에도 부끄럽다. 하지만 내 말은 틀렸다. 재즈를 ‘안다–모른다‘의 편가르기를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최성호의 즉흥음악을 어떤 이해의 대상으로 볼 수 있을까?

어떤 음악이 좋다, 나쁘다의 정도로 반응하지 못하는 나, 특히 재즈를 잘 모르는 나는 그저 그의 연주를 듣고는 오만가지 딴생각을 하며 옆길로 샌다. 어떤 대목에선 서정적인 느낌을 받다가도, 과거의 추억으로 살며시 빠지기도 한다. 다른 어느 부분에서는 연주자들의 순수한 열정이 느껴지다가도 또 다른 부분에서는 섬세하고 아름다운 ‘소리‘라고 느끼는 것이다. 글세다. 묘하게 자유스러운 구성과 음색에서 음색이 한마디로 ‘예쁘다‘라고 느끼는 것은 나보다도 연주자들이 더할 것 같다.

이들 연주자의 음악을 이반 일리치의 언어로 말하면 철저히 ‘자급자족적 음색‘이라 할 수 있을까. 획일화된 언어를 만인을 위한 통치로 적용하려했던 중세 언어학자 네브리하의 경우가 떠오른다. ‘표준화된 언어‘를 통해 사람들의 정신적 지배 내지는 통제를 원했던 그의 오랜 사례처럼, 우리는 이미 우리도 인식하지 못하는 노골화된 편견의 속박 속에서 이를 인식조차 하지 못한 체 타인을 평가하고 선언하는 폭력을 저지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선 특이점과 같이 실험적인 팀이 국내에 많지 않은 것 같아 아쉽지만, 과거보다는 많아졌다는데 안심해야할까. 재즈는 특히 즉흥연주는 많은 이들의 ‘공감‘의 대상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이성에 너무 호소하며 대상을 ‘이해‘해야한다는 강박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난 특이점의 음악을 듣고 그저 그의 손가락의 움직임을 상상하기도하고, 드럼 박자에 나의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딴짓‘을 한다. 이들의 음악을 ‘이해‘하려하기보다 이들의 음색을 들으며 떠오른 그 때 그 때의 단상을—그리고 곧 사라져버릴—오롯이 나만의 ‘딴 생각‘을 소유해볼 뿐이다. 어쩌면 클래식과 다른 재즈의 ‘자유로움‘이라 하면 들을 때마다 나의 ‘딴 생각‘이 달라질 수 있는 자유가 아닐까.

2집 앨범이 나온지 얼마 되지 읺은 모양이다.

특이점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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