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히말라야 씨
스티븐 얼터 지음, 허형은 옮김 / 책세상 / 2017년 3월
평점 :
절판


<친애하는 히말라야 >

(Becoming a Mountain: Himalyan Journeys in Search of the Sacred and the Sublime)

스티븐 얼터(Stephen Alter) 지음 | 허형은 옮김 | 책세상

 

 

 

(걷기의 철학)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육체적, 심리적 상처를 입은 저자 스티븐 얼터는 어느 문득 산행을 결심한다. 히말라야 기슭에서 오래 살았고 산사나이들에 대해 알지만 저자는 전문 산악인이 아니라 작가였다. 학창 시절 좋아하던 사냥을 접고 대신 걷기에 중독되었다고 한다. 예순에 가까운 그가 집의 침입자들로부터 치명적인 공격을 받고, 상처를 입은 서서히 회복한 산을 오르며 치유하는 과정은 묵직한 감동을 나에게 주었다. 스티븐 얼터의 기나긴 히말라야 등산기가 나에게 특별히 닿은 이유는 자신도 마음의 감기 불리는 우울증 경험해 적이 있어서이다. 자신이 산을 주로 오른 것은 아니지만 역시 살기위해서걸었더랬다. 집안에 박혀서 스스로에 대한 무가치함을 끊임없이 재확인하지 않기 위해 나역시 밖으로 뛰쳐나가 걷고 걸었던 것이다. 저자가 산행에 동행한 라투와 죽음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고통스러운 살아남는 과정이다라고 대목을 읽을 역시 스티븐 얼터가 되었다. 같은 이유로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하루에 시간이고 걸었다고 하는 시인 랭보가 나는 머릿속에 자리 잡은 유령들을 쫓아내기 위해 하염없이 걸어 다녀야만 했다.”(231)라고 말한 부분도 역시 기억에 남는다. 내가 혼자 경험하고 기억하고 있던 나의 걷기 경험은 이미 시인 랭보가 같은 이유로 무한히 걸었다는 대목을 읽었을 , 역시 세상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님을 다시 확인할 있었다     

   내가 이러려고 산행을 했나라는 말이 나올법하게 저자는 힘겨운 산행을 결심하고 강행한다. 그는 그토록 심하게 상처를 입은 산행을 결심하게 되었을까? 무엇보다 스물 살때 걷기에 중독되었다고 말하는 저자는 50 중반이 되어 기나긴 산행을 기획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이럴 이해가 되는 표현이다. 어쨌든 그는 죽음의 문턱을 넘는 경험을 , 단순한 육체의 회복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육신을 강하게 만들 목표를 세우고 싶었다 말한다. 히말라야 기슭에서 오래 살아온 스티븐에게 걷기란 도시인들의 걷기와는 다른 생활의 중심일 같다. 스티븐 얼터는 걷기를 물활론자들은 진즉에 알고 있었던, 자연에는 존재하는 신성(神聖), 정의하기 힘든 존재의 발자취를 인정하는 의식”(223)이라고 썼다. 무엇보다 스티븐 얼터에게 히말라야 산행은 자유의지를 지닌 살아있는 존재로서 스스로의 한계에 부딫쳐 보고 느끼는 과정 자체가 삶이며, 신성을 인지하는 행위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스티븐은 산행 과정에서 자연을 묘사하고 히말라야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줄 아니라 걷기에 대해서도 상당한 지면을 할애한다. 속에 자발적으로 들어가서 2년을 살았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걷기 철학을 소개하기도 한다. ‘도로와 닦인 길을 버리고 미답의 황무지를 찾아다니라라고 말한 소로의 생각은 위험하게 살아라라고 외친 니체의 철학과도 비슷하게 들린다. 명상 행위로서의 걷기를 말하는 대목 또한 인상적이다. 걷는 행위가 육체적 건강 증진뿐만 아니라 명상의 행위가 있다는 것이다. 가우타마 붓다는 방랑하라. 물질적 부를 모두 버리고 욕망과 고뇌에서 벗어나게 해줄 길을 찾아 나서라.’라고 제자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너희가 자체가 되기 전에는 길을 여행할 없다.”(218)라는 가우타마 붓다의 말은 과연 무슨뜻일까. 말은 저자의 기나긴 산행을 따라가며 줄곧 나에 숙제를 던져 준말이었다.  

 

       

 

(만다라의 철학)

산행을 하며 걷기의 철학을 상당히 이야기 하지만, 불교의 수도승들이 정성을 들여 완성한다는 만다라에 얽힌 이야기도 새롭고 매력있게 다가왔다. 불교 수도승들이 며칠 또는 주에 걸쳐 완성하는 모래 만다라라는 완성된 직후, 짧은 경배 의식이 끝나면 바로 손으로 쓸어없애버린다고 한다. 황당한 행위 또한 만다라의 과정에 속하는 행위로서 환영에 불과한 물질세계에 대한 은유라고 한다. 젊은 시절 이러한 행위를 이해를 하지 못했는데, 책을 읽으면서 무릎을 치게 된다.

모래 알갱이를 하나씩 더하는 과정 자체가 일종의 정신수행이다. 그러나 그렇게 완성한 만다라를 짧은 경배 의식이 끝나면 바로 손으로 쓸어 없애버리는데, 이는 환영에 불과한 물질세계에 대한 은유이다.”(318)

 

 

 

(자연에 대한 신성함과 숭고함)

세속을 훌쩍 떠난 장소인 해발 5000미터 이상의 히말라야 산행에서 자연은 모습을 시시각각 다르게 보여준다. 히말라야에 얽힌 인간의 이야기는 이곳에서 모두 신성과 얽혀있다. 저자가 말해주는 여러 인도의 신화 이야기에는 변신 하는 신들이 등장하는데, 이러한 변형신화는 히말라야에서 끊임없이 변하는 날씨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산을 타넘는 구름의 모습, 짙은 구름에 의해 가려진 산의 봉우리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고 누군들 자연의 모습에 감탄과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있을까. 스티븐은 숭고함 어떻게 이해했을까. 그는 숭고함이란 우리를 불안하면서 동시에 감동에 젖은 상태로 만드는 일종의 감정적 현기증이다.”(356)라고 표현해두었다. 이런 감정을 저자는 책의 부제에도 밝혀 두었다. 신성함과 숭고함을 찾아나선 히말라야 산행이란 표현에서도 있듯이 산행을 통해 저자가 바라본 자연의 모습에서 거대한 산이 주는 경외감과 숭고함은 자연스럽게 우러나올 수밖에 없지 않을까.

 

 

(등반에 실패하고 스스로에게 주는 위안)

스티븐은 결국 산행 과정에서 불길해보이는 꿈이 예언한 , 산이 도와주지 못해 산행을 중단하게 된다. 이후로 이렇게 높은 산에는 오르지 못할 것이라는 언급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남은 절반의 여정인 돌아가는 길을 살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다독인다. 스티븐의 산행을 따라가며 그의 산행은 산이 거기에 있기에정복하려 것이 아님을 더욱 분명히 있었다. 저자의 산행을 통해 그는 좀더 산이 주는 가르침을 몸으로 받아들인 같다. 저자 스스로에게 전하는 자신의 위안 대목에 눈길이 간다.

어쩌면 이번 원정에 쏟아부은 모든 육체적, 물질적 자원과 희망, 기대들 하등 무익한 모험에 낭비된 것처럼 보일 있겠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옳은 결정들을 내렸음을, 그리고 우리가 하려고 했던 일이 무엇이건 최선을 다했음을 앎에서 오는 만족감이 있다. (…) , 패배를 받아들이되 우리 정신과 육체가 감당해야할 한계 또한 받아들이는 것이다.”(417)  

 

   책을 덮으며 문득 스티븐의 히말라야 산행은 자체가 만다라수행과정을 닮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모래를 손에 쥐고 정성껏 모양을 내고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시시각각 변하는 기후와 여건에도 굴하지 않고 오르는 산행을 떠올리게 해준다. 그리고 오르지 못함을 알게 되었을 , 때가 바로 자신의 손으로 만다라를 손으로 쓸어 담아야 순간임을 알게된 것이다. 세계 최고의 전문 등반가들도 언제나 번의 시도로 산에 오른 사람은 없음을 스티븐이 만난 최고의 등반가들과의 대화를 통해 배웠다. 오히려 그들은 전문 등반가가 되어갈 수록 산을 이해하고, 앞에 더욱 자신의 한계를 깨달은 사람들이란 생각을 해본다.

   <친애하는 히말라야 > 저자의 히말라야 정상 정복기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저자의 실패한 산행 기록을 따라가며 저자가 바라본 자연의 변덕스러운 모습과 너그러운 모습을 모두 있었던 점이 좋았다. 저자가 지고 다른 저자의 산행기의 저자(브루스 채트윈) 책에 남긴 말도 오래 인상에 남는다. 저자의 동행 짐꾼들이 구간을 강행하다 우리 영혼이 따라잡을 있게하루 동안 쉬어가야한다고 넉살좋게 주장하는 대목도 마음에 든다. 산행 밤새 쉬지 않고 폭풍우를 겪은 아침, 해발 3500미터 이상의 고지대에서 있다는 브라만카말 수만송이를 발견했을 꽃밭의 절경 모습과 저자의 표정을 상상해본다.

   저자 스티븐 얼터 스스로의 치유과정이기도한 자신의 히말라야 산행에서 그는 무엇을 얻었을까 궁금해진다. 마치 내가 저자의 산행을 취재하는 기자와 같은 심정으로 읽어나갔던 여정이었다. 여운을 좀더 남겨두기 위해 다소 교훈적인 느낌은 나지만 마지막 부분을 인용하며 끝내기로 한다.

 

이런 운명론적 해석은 제쳐두고 우리는 계단식 논밭이나 , 돌와 댐을 얼마나 만이 건설하든 산은 항상 우리의 통제권 밖에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히말라야를 길들이고 굴복시키는 대신 연민과 논리적 사고, 그리고 실체를 없는 신앙에 대한 존중을 가지고 산에 접근해야 한다. 고지를 정복하고 식만화하는 대신, 경계가 불명확한 영토를 따먹기 하듯 차지하며 고산지대의 너그러운 자연을 파괴하는 대신, 우리는 산을 닮아가야 한다. 인간보다 훨씬 존재이자 인간에 비해 무한히 영속적인 존재의 일부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48면)
"우선, 내가 불굴의 존재라는 생각을 감히 다시는 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차치하고라도 단순히 살아남은 정도의 도전을 넘어 나는 오히려 육신을 더 강하게 만들 목표를 세우고 싶었다."

(69면)
"정상까지 오르는 데 체력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 발을 붙잡는 건 마음 속 공포였다."

(80면)
"산과 하나가 되는 가장 중요한 단계는 타인이 쓴 책을 전부 덮어버리고 오직 바위와 얼음에 새겨진, 혹은 저 위쪽 숲에서 흘러내리는 개울에 새겨져 있는 말들만 읽는 것이다."

(135면)
"라투는 죽는 건 그리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듯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한다. 고통스러운 건 살아남는 과정이다."

(159면)
"나는 잃어버린 것들을 찾기 위해 산에 오른다."

-저자는 과연 무엇을 찾고 싶었을까?

(262면)
"챙겨온 책 중에서 브루스 채트윈의 <노랫길>을 읽는데, 동행한 짐꾼들이 몇 구간을 강행하다 ‘우리 영혼이 따라잡을 수 있게‘ 하루 쉬어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장면이 나온다."

(356면) 숭고함에 대하여
"에드먼드 버크나 칸트 같은 철학자도 인간이 자연의 가장 극적인 경이로움을 접하면서 경험하는 양면적인 반응을 ‘숭고함의 심미적 모순‘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예를 들어 산의 절경을 보면서 두려움과 경외감을 동시에 느끼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알프스나 히말라야에서 새벽이나 황혼 무렵에 목격할 수 있는 어둠과 빛의 극명한 대조는 두려움과 흥분을 동시에 자아낸다. 한마디로 숭고함이란 우리를 불안하면서 동시에 감동에 젖은 상태로 만드는 일종의 정신적 현기증이다. 이런 경험으로 우리는 발밑으로 아찔하게 떨어지는 절벽보다 더 불안하고 더 향정신적인 은유의 낭떠러지 가장자리에 선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원시적인 반작용일 수도 있다. 그런 기분을 느끼기 위해, 창조자이자 파괴자인 존재를 찾아 자꾸만 산에 오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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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버거(John Berger) 지음 | 김현우 옮김 | 열화당

 

 

[I] 작가의 글쓰기

노()작가의 문장은 나는 거의 팔십 년간 글을 써왔다. 시작한다. 80 가까이 글을 써온 버거에게 글쓰기란 무엇이었을까. “글쓰기 활동은 내게 필요한 것이었다. 활동 덕분에 나는 의미를 찾고, 계속할 있었다.라고 작가는 자신의 글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버거가 발표한 다른 책들을 많이 읽어보지 못했지만,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담긴 작가의 글쓰기는 흐르듯 자연스럽고 매우 직관적이다. 어떤 외부의 소재로부터 글을 시작하여 곧바로 소재가 이어주는 현상/기억 등의 내면에서 이야기를 전개하다가 다시 어느 순간 원래의 화제로 돌아가곤한다. 버거는 외부의 소재/사물이 내면으로 흘러들어가도록 하고 소재와 자신의 내면이 나누는 담소를 듣는 것같다. 오감을 자극하는 공간에서 저자는 순간을 인식하며 현재와 하나가 된다. 버거의 문장은 차분하고 군더더기가 없으며 함축적이다. 

 

책의 곳곳에서 버거는 오랜 지인들의 죽음을 계기로, 사망한 지인들의 장례식에 찾아가며 이들의 생전 모습을 떠올리고 이들과의 추억을 소환한다. 따라서 저자 자신의 오랜 지인을 기억하는 자신만의 방식을 이야기하고 있기도 하다. 버거의 지인들은 평생지기들이다. 보통이 30 정도인 듯하고, 사진가 모르처럼 50 지기도 있다. 책은 현재를 충실하고 온전하게 사는 버거의 방식 또한 살펴볼 있다. 개인의 제한적인 시간성 속에서 망각에 저항하고영원을 사는 법이 담겨있는 것이다. 

 

 

[II] 자연의 텍스트 읽기 - 드로잉

버거는 진정한 번역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서 글을 써내려 가지만 어느 번역 맥락은 언어의 문제에서 벗어나 본인의 관심사인 드로잉으로 옮겨간다. ‘외양이라는 텍스트를 풀어내어 그대로 옮기려고 노력했던 그는 자연의 외양들을 텍스트로 읽어내는 일이 가능할까”(104)라고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에는 저자의 오랜 지인의 모습이나, 채플린과 같은 이의 초상 또는 그림의 부분을 보고 거칠게 스케치한 그림과 장미를 비롯한 여러 식물들의 그림들이 실려있다.

 

   버거에게 있어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텍스트 번역의 과정과 다르지 않는 듯하다. 아무리 손기술이 좋은 화가도 자연의 모습을 동일하게 그리는 것은 불가능한데, 화가는 자연을 대상화하여 인지한 화가에게 떠오른 심상, 형성된 이미지를 드러내 보이는 작업을 뿐이다.  

 

   이미지를 이야기 , 작가 자신이 그린 붓꽃 그림과 사진작가 타토 올리바스(Tato Olivas) 버거의 편지에 대한 답신으로 무용수 사라 바라스(sara Baras) 사진을 보내온 장면은 무척 흥미롭다. 개인적으로는 버거의 붓꽃 그림과 무용수의 사진을 순간 소름이 돋았다. 책에 나온 내용을 보니 버거 자신도 사진작가 타토가 보내준 사진을 보고 자신의 눈을 믿을 없었다라고 하였다. 사진에 포착된 무용수의 역동적인 동작이 주는 에너지와 붓꽃 그림에서 보여주는 동적 형태가 주는 정서가 너무나 흡사했기 때문이다.  사진과 그림을 보면 때서야 버거의 설명이 더욱 실감나게 이해된다.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붓꽃 그림과 무용수 사진) 무한할 만큼 멀리 떨어져 있지만, 리듬의 관점에서는 함께 움직이고 있다.”(81)

 

   이제야 비로소 작가가 간결하게 모든 시대, 모든 춤의 모태가 동작’(81)이란 표현이 스스로 맥락을 드러내고 정당성을 획득한다.

 

 

[III] 신자유주의 비판

아흔에 가까웠던 작가는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주변 머나먼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회피하지 않고 관심을 갖는다. 책의 곳곳에서 현대인들의 삶의 영원히 바꿔버린 투기 금융자본주의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날카롭게 지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오늘날 세계 경제를 지배하고 있는 투기 금융 자본은 정부를 노예 주인처럼 활용하고, 세계 미디어를 마약 공급상처럼 활용한다. 폭정의 유일한 목표는 이윤과 자본 축적인데, 이를 위해 사람들에게 소란하고, 위태롭고, 매정하고, 설명할 없는 세계관 혹은 삶의 패턴을 강요한다.”(35)

 

미국이 이라크에 있는 자신들의 정유 시설을 지키기 위해 삼백 개가 넘는 부대를 은밀히 파병했다는 소식”(56)

 

버거는 현대의 금융 자본주의가 야기한 폭력성에도 예민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던 작가였다. 대한민국에서 1997 외환위기를 통해 사회의 질적인 변화를 경험한 기억을 떠오려보면, 작가는 현대사회의 본질을 명료한 언어로 파악하고 있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이십세기의 마지막 , 1990년대를 지나며 세계는 근본적으로 달라져 버렸다. 시기에 대리인들, 로비스트들, 다국적 투기 자본이 지구촌의 길을 정하는 최고 결정권자가 되었다. 그게 세계화. 신자유주의의 독단은 전통적인 정치학을 쓸모없게 만들어 버렸다. 의회 정치인들은 무력해졌고, 그들이 있는 것이라고는 말뿐이다. 미디어도 똑같이 공허하고 언어를 이어받았다. 유럽, 국제적 연대, 독립 같은 용어는 쓸모없고, 내용도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국제적인 뉴스를 전할 약어들을 남발하는 역시, 내용 없음을 향한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다.”(60-61)

 

모든 정치적인 활동의 노력이 투기 자본의 노예로 전락해버릴 위기에 처해 있음에 노()예술가는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자신을 전문적인 작가라기 보다는 그저 곳을 메우는 사람으로 생각한다는 고백과 비교하면 얼마나 지성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지 새삼 발견하게 된다. 다시 생각해보면 버거에게 글쓰기란 의미를 찾도록도와주는 수단으로써, 이는 보편적인 인간으로서 항상 깨어있게 해주며 망각에 저항하도록 해주는 평생의 지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정부 관료들만을 위한 자유, 당원들만을 위한 자유는 - 다수는 아니더라도 - 전혀 자유가 아니다. 자유는 언제나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자유여야 한다."(16면)
- 로자 룩셈부르크의 말 중에서

"(고아는) 혼자 살아가는 프리랜서가 된다." (27면)

"이젠 내가 그것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나를 바라본다."(57면)
- 작가 자신이 수영을 하다 하늘에 떠 있는 ‘새털구름‘을 바라보고 그린 그림과 관련하여

"나는 스스로 중요한, 혹은 전문적인 작가라기 보다는 그저 빈 곳을 메우는 사람정도라고 생각하고 있다."(10면)

본인의 드로잉과 관련하여

"드로잉을 할 때, 나는 외양이라는 텍스트를 풀어내서 그대로 옮기려고 노력한다. 물론 이 외양이라는 텍스트는 이미 나의 모국어 안에 설명할 수 없는, 하지만 확실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9면)

"자연의 외양들을 텍스트로 ‘읽어내는’ 일이 가능할까"(104면)



신자유주의 비판

"마찬가지로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생겨나는, 또한 점점 늘어나는 인류의 가난과 계속되고 있는 지구에 대한 착취도 유토피아의 이름으로 시행되고, 정당화되고 있다. 그 유토피아는 자유시장방식이 아무런 제약 없이 마음껏 작동할 때 보장되는 것이다. 그건, 밀턴 프리드먼의 말에 따르면,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넥타이 색깔을 놓고 투표하는’ 세상이다."(89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투기 금융자본이 지배하는 전체주의적 세계 질서에서 미디어는 끊임없이 정보를 폭탄처럼 쏟아붓는다. 하지만 그 정보들은 대부분 계획적인 교란에 불과하며, 진실로부터, 본질적이고 다급한 것으로부터 우리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것들이다. 정보들은 대부분 한때 정치라고 불리던 활동에 관한 것이지만, 정치는 이미 주식 거래인과 은행의 로비를 앞세운 전 세계적 투기 자본의 독재로 대체되어 버렸다."(104-5면)

신자유주의 사회의 ‘언어‘ 비판

"여기에 미디어가 세상을 전달하고 분류할 때 사용하는 언어가 더해진다. 그것은 전문 경영인들이 사용하는 전문용어나 논리와 매우 비슷하다. 그 언어는 모든 것을 ‘계량화’하고 본질, 혹은 질적인 면에 대해서는 좀처럼 언급하지 않는다. 그것은 비율을 이야기하고, 여론조사의 변동이나 실험률, 성장률, 증가하는 채무, 이산화탄소 측정치 등등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숫자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목소리지만 삶이나 고통받는 신체에 대해서는 아니다. 그것은 후회나 희망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새털구름은 북족, 수영장의 끝을 향해 흘러간다. 나는 물에 뜬 채로 가만히 누워, 꼼짝도 하지 않는다. 나는 구름을 지켜보며, 눈으로 그 넘실거리는 모양을 기록한다. 그때 풍경이 보여 주는 확신이 변한다. 변화를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천천히 그 변화는 분명해지고, 내가 받는 확신도 더 깊어진다. 하얀 새털구름의 털들이 손을 머리 뒤로 깍지 낀 채 물 위에 떠 있는 한 남자를 바라본다. 이젠 내가 그것들을 바로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나를 바라본다." (56-5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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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 - 아름다운 삶을 위한 철학의 기술
빌헬름 슈미트 지음, 장영태 옮김 / 책세상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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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

빌헬름 슈미트 지음  |  장영태 옮김  |  [책세상]




(소풍 - 철학으로의 초대)

'남녀 두 사람이 같은 한 침대에서 서로 등을 지고 반대 방향으로 어긋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남자는 손에서 책을 놓고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듯하다.' 이 책 <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의 저자 빌헬름 슈미트는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철학으로의 소풍]을 화두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림 속에 포착된 어느 한 순간의 실존적 고독이 고스란히 부각되어 있는 듯하다. 슈미트는 소외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소외는 근본적이며, 속일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럽다.”(25면) 이 그림은 호퍼의 다른 작품처럼 정적과 부조리할 정도로 느껴지는 햇빛과 고독으로 가득한 한 삶의 에피소드를 표현해내는 듯하다. 어쩌면 그림 속의 남자가 손에서 책을 놓고 생각에 잠겨있는 순간이야 말로 비로소 ‘철학으로의 소풍’이 가능한 순간이 아닐까. 


왜 호퍼는 [철학으로의 소풍(Excursion into philosophy)]라는 제목을 이 그림에 붙였을까. 소풍은 우리의 흔한 일상은 아니지만 우리 삶에 친숙한 요소이다. 나아가 익숙한 일상을 벗어난 여행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소풍은 ‘매우 짧은 여행’으로 생각해볼 수 있겠다. 우리가 사는 ‘다른’ 현대 속의 바쁜 스케줄(삶이 아닌) 속에서 익숙하지 않은 구조를 잠시 벗어나 ‘나’를 찾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음을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다시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 본다. 호퍼가 ‘사실주의 화가’라고도 불린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의 그림이 마음에 드는 것은 그림의 인물과 배경이 어우러져 내뿜는 정적, 고요함의 정서가 인상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묘하게도 그림은 너무나 ‘사진적’이란 느낌을 주고있다. 사진에는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배경의 사물이 담긴다. 사진 작가는 자신이 보는 대상의 어느 한 프레임만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부만 보이는 액자, 일부만 보이는 창문, 조각나있는 햇빛. 이렇게 호퍼는 실존적 삶의 한 순간을 담았다. 이 순간을 저자 슈미트는 다음과 같이 첨언한다. “이 정지의 순간이, 철학과 성찰의 순간으로서의 정지가 본보기로 포착되어 있다.”(22면)

이 정지의 순간은 슈미트가 호퍼의 그림에서 지적한 ‘의미없는 햇빛’이 충만한 공간과 이를 가득 채운 시간을 의미하는 것 같다. 따라서 이 ‘무의미한’ 햇빛은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이 ‘정지한 순간’의 중요성은 슈미트 역시 사소한 것이 아닌 오히려 매우 소중한 시간임을 재인식하고 있다. “빈 시간은 자신의 일관성을 회복하고, 새롭게 형상화할 수 있는 자기의 시간인 것이다.”(124면)


결국 호퍼의 그림에서 그림 속 남자가 책을 내려놓고 생각에 잠긴 이 순간은 그림 속 다른 한 곳에서 무심히 보이는 창 밖의 풍경처럼 자신을 밖에서 바라보게하는 시간으로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슈미트는 이 ‘빈 시간’을 통해서 비로소 주체는 ‘시간을 소유’하기에 이르며 “자기 자신 및 다른 사람들을 위한 그리고 다른 일들을 위한 시간을 갖게 된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슈미트는 ‘시간을 소유한다는 것’을 ‘편안하게 살아온 실존의 형식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것이 곧 ‘나 자신으로부터 거리두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다른 한편, ‘시간 소유하기’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모든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마치 우리가 <어린 왕자>중에서, 여우와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대목을 흔히 떠올리듯 ‘서로에게 길들여지는 것’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이는 저자가 ‘익명성과 보편성을 떨쳐’버리고, ‘특수성’을 갖게 됨을 의미할 것이다. 이름을 지어주고, 이름으로 서로를 불러주는 것이 곧 ‘나의 시간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삶의 기술로서의 철학 - 아름다운 삶을 위한 소품)

책을 다 읽고 호퍼의 [철학으로의 소풍]을 다시 살펴보니 저자는 독자들을 ‘삶의 기술’로서의 철학하는 시간으로 초대하기 위해 이 그림을 제시한 것 같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삶의 기술’로서의 철학은 탁상공론과 같은 ‘철학을 위한 철학’이 아니라, 삶에 활용될 수 있는 ‘도구’로서의 기능성을 염두해둔 듯하다. 이 책에는 ‘쾌락누리기’, ‘쾌활함’, ‘분노’, ‘반어와 멜랑콜리’와 같은 다양한 주제로의 ‘짧은 여행’을 의도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생각되는 점은 저자 빌헬름 슈미트가 책 전반에 걸쳐 ‘주체적으로 아름다운 삶을 살기 위한 소품으로서의 철학하기’를 줄곧 말하려는 듯하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나를 낯설게 바라보기’가 아닐까.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나 자신으로부터 거리 두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에드워드 호퍼의 [철학으로의 소풍]일 것이다. 


빌헬름 슈미트는 성찰적, 철학적 ‘삶의 기술’을 이야기하기 위해 세네카, 아리스토넬레스, 데모크리토스와 같은 고대 철학자 뿐만 아니라 몽테뉴, 니체, 키르케고르, 쇼펜하우어, 하이데거, 아도르노, 빅토르 프랭클, 미셸 푸코와 같은 익숙한 이름의 철학자, 사상가를 소환한다. 책을 읽는 도중에 받은 느낌은 어쩌면 이 책은 몽테뉴의 <수상록>과 재독철학자 한병철 교수의 저작들 사이의 어느 한 지점 즈음인 인상을 준다는 점이었다. 흥미롭게도 역자 후기에서 책의 역자도 역시 한병철 교수를 언급하고 있다. 아마도 ‘무한 긍정의 성과 사회’나 근대를 ‘부정성의 제거’와 연관지어 설명하고, ‘부정성의 긍정’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한병철교수의 스타일을 떠올리게 하는 점이 있다. 반면 에세(essai)라는 자기 탐색적이고 성찰적인 글쓰기 장르를 처음 시도했던 몽테뉴 처럼 저자 자신의 개인적 성찰을 담고 있지는 않으나 주제의 선정 및 책의 구조가 몽테뉴의 <수상록>을 떠올리게 하는 특징은 분명히 존재한다. 아울러 ‘성찰적 삶의 기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만큼, 몽테뉴의 글쓰기 방식은 은연중에 이 책의 저술과정에도 분명 영향을 준 요소라고 볼 수 있을것이다. 




(가상공간에 대한 사유의 확장)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슈미트는 과거의 철학자, 사상가들을 소환하여 삶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들에 대해 성찰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더 나아가 과거의 철학자들이 다루어 본적없는 ‘가상공간’을 이야기 하기도 한다. 한병철의 저작에서 ‘정보’와 ‘지식’의 구별짓기를 시도하며 그 특징을 설명하듯, 슈미트도 ‘정보’와 ‘주체적 지혜의 필요성’을 언급하고 있다. 슈미트는 ‘정보’를 ‘일상의 사물을 밀어내버리는 기형적인 물건들’이라는 빌렘 플루서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이 ‘기형적인 물건들’인 정보가 떠다니는 무한한 가상공간의 현실을 긍정할만한 점이 있다면 이는 ‘탈중심적 정보 전달 공간’으로서의 기능일 것이다. ‘정보의 바다’로서 긍정적으로 평가해본다면, 우리는 무한에 가까운 정보를 담고있는 이 공간을 하나의 사전, 나아가 도서관으로서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지구 반대편에서 만들어지는 물건을 가상공간에 마련된 상거래 플랫폼을 통해 구입하거나 조달할 수 있다는 장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이 정보를 ‘어떻게 얻고, 정보의 중요도의 순위를 결정하는 일’이 중요해진다는 점을 슈미트는 지적하고 있다. 곧 우리의 삶이 충만해지도록 이러한 행위를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보의 ‘관리’는 여전히 주체의 몫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가상공간에서 정보의 사용 주체로서 우리에게는 의무가 주어지는데 그것은 “정보와 통신이 한도를 넘어설 때 그 양을 줄이고 성찰의 공간을 다시 획득하는 것이 삶의 수행에서 의무가 된다.”(224면)라는 점이다. 우리가 정보를 관리하는 주체로서 의무를 다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주체성을 상실하게 될 것을 슈미트는 다시금 경고한다. “타자에게 자신을 맡기지 않으려면 자신의 고유한 정보능력을 획득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면 ‘정보 엘리트’에게 자신을 내 맡기는 길밖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229면)라는 것이다. 곧 우리가 정보의 ‘수문지기’가 되라는 주문일텐데, 이 주장은 ‘정보’에 관해 의심을 갖고, 근거를 찾아내며, 독자적으로 판단하라고 말하던 언어학자 촘스키의 입장과도 일치한다. 정보로 넘쳐나는 가상공간을 만약 몽테뉴가 21세기를 살면서 목격하고 체험해 보게 된다면, 아마도 ‘삶의 주체’로서 이와 같은 입장을 표명했을 것같다. 




(죽음을 부정하는 시대-우리는?)

언젠간 다가올 ‘죽음’에 대해 독특한 견해를 피력한 몽테뉴의 <수상록> ‘죽음에 대하여’를 보면,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 정온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면 만족한다는 몽테뉴의 독특한 관점을 엿볼 수 있다. 시대마다, 지역마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엄연한 자연의 질서인 반면, ‘죽음’에 대한 관점 및 태도에는 큰 차이가 있다. 특히나 현대는 ‘죽음’이 거부당하는 시기라고 서경식 교수는 지적하고 있지 않은가. 나의 조부/조모만 해도 모두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셨지만, 이제는 대부분의 사람이 죽음을 맞이하는 공간이 병원/요양원이 되어 버렸다. 가정에서 ‘죽음’은 금기시되어 버렸고, 거부당하는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슈미트는 “삶의 기술에서 중요한 것은 삶의 한계에 대한 인식이지 죽음에 이르는 존재가 아니다.”(43면)라고 강변한다. 곧 타인의 죽음은 곧 나의 유한성 내지는 한계를 자각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이해된다. 앞서 슈미트가 제시했던 에드워드 호퍼의 [철학의로의 소풍]도 역시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본다면 ‘삶의 한계’에 대한 인식의 순간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이유는 슈미트가 “철학을 한다는 것은 이러한 한계의식 안에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44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기도하다.


아울러 슈미트는 죽음의 순간을 다음과 같이 ‘낯설게 이야기하기’를 시도한다. “죽음은 솔직함의 극단적 지점이며, 더 이상 회피를 용납하지 않는 진리의 순간이다.”(109면) 곧 죽음이란 하나의 작품으로서의 개인의 삶이 ‘완성’되는 시점일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죽는다. 우리는 모두 생명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슈미트는 우리가 죽음의 면전에서 제기되는 마지막 질문을 상상한다. “그것(나의 삶)은 아름다운 삶, 충만한 실존이었나?”(109면)라고 말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20여 년 전 나의 학창 시절에 읽어본 천상병 시인의 시 [귀천]의 마지막 연을 떠올려본다.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시인의 시에서 나는 ‘죽음’에 대한 염려, 두려움, 또는 부정성을 발견할 수 없다. 자신의 ‘짧았던 인생’을 ‘소풍’으로 보았던 시인은 바로 자신에게 ‘아름다운 삶’을 살았노라 말하길 희망하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의 한 장인 ‘죽음을 동반하는 삶에 대하여’에 표현한 슈미트의 의도는 천상병 시인의 이 싯구에 모두 담겨있다고 본다. 



(오늘의 소풍을 끝내며)

이 책은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 하룻밤에 읽어내는 책이라기보다 독자의 일상에서 독자의 눈에 띄는 주제 하나를 읽어보고, 다시 책을 내려 놓은 다음 성찰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한 문장, 한 문장 긴 호흡으로 텍스트를 따라가며 음미해보면, 급한 마음에 빨리 읽을 때 전혀 다가오지 않았던 문장들이 어느 순간 일어나서 나에게 다가오기도 했다. 이 책이 한병철 교수의 저작들과 다르게 느껴지는 점 또 하나는 이 책이 한병철 교수의 책보다 조금 더 ‘추상적’(혹은 막연함)이라는 느낌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슈미트는 독자와의 적절한 ‘거리두기’를 의도함으로써 ‘독자 나름의 소풍’으로 초대하고 싶었을 수도 있겠고, 혹은 우리 각자의 보다 긴 삶이 이러한 ‘짧은 여행’인 소풍들을 통해 더욱 아름답게 가꾸어 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나도 오늘의 ‘소풍’을 마무리하고, 다음 ‘소풍’을 새롭게 기대해본다. 






(이 리뷰는 책세상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소외는 근본적이며, 속일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럽다." (25면)

"삶의 기술에서 중요한 것은 삶의 한계에 대한 인식이지 ‘죽음에 이르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43면)

"철학을 한다는 것은 이런 한계의식 안에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44면)

(쾌락에 대해)
"쾌락은 자신을 넘어서도록 촉진하고, 일관성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뒤집어 해체하고 새롭게 조립한다."(70면)

"쾌락의 활용도 에로티시즘 안에 깃들어야 참된 향유를 낳는다."(76면)

"정신, 영혼, 육체를 포괄하는 에로틱한 만남이 이상적이다."(77면)

(죽음에 대하여)
*죽음의 면전에서 마지막으로 제기되는 물음 - "그것(나의 삶)은 아름다운 삶, 충만한 실존이었나? "(109면)

"우리는 근대가 고통을 추방했을 뿐만 아니라 죽음조차 망각했다는 이야기를, 다시 말해 근대적 삶으로부터 제외되었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99면)

(시간 사용하기에 대해)

"빈 시간은 자신의 일관성을 회복하고, 새롭게 형상화할 수 있는 자기의 시간인 것이다."(124면)

"빈 시간은 현재의 어려움과 거리를 두게 하고, 그 어려움을 밖에서 바라보게 하며, 미래적인 것의 넓이를 시야에 떠오르게 한다."(124면)

(시도하며 살아가기)

"살면서 의심이 생기면 자기 자신과 자신의 가능성들을 시도해보는 것이 중요하다."(127면)

"상상은 다르게 사유하고, 다르게 사는 시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133면)

(멜랑콜리, 성장의 고통)

"삶의 기술의 주체에게 멜랑콜리의 의미는 ‘골똘히 생각함‘이다. 골똘히 생각함으로써 자신에게 성찰적 거리를 취하고 스스로에게 낯설어지고, ‘정체성‘으로 생각했던 것의 붕괴를 경험하고, 습관적으로 살면서 삶을 그냥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는 자명함을 벗어던지게 되는 것이다."(185면)

(가상공간에 대해)

"가상공간은 ‘탈중심적 정보전달의 공간‘이다."(223면)

"과학기술의 전체성 요구에서 벗어나고 삶의 형성의 다른 가능성에 개방된 자세를 취하기 위해서는 삼가는 태도, 회의적인 거리 두기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228면)

"타자에게 자신을 맡기지 않으려면 자신의 고유한 정보능력을 획득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면 ‘정보엘리트‘에게 자신을 내맡기는 길밖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229면)

(쾌활함에 대하여)

"쾌활함은 평정의 태도이다."(252면)

"쾌활함은 기쁨이 아니라 충만한 삶의 표현이라는 점이다."(255면)

"쾌활함이 멜랑콜리와 멀지 않다."(258면)
"쾌활함은 유한성으로의 갇힘이 아니며, 오히려 무한 차원을 향한 개방이다."

"쾌활함은 후회없는 삶을 이끄는 것을 말한다."(259면)
"쾌활함은 아름다움의 실현과 함께 커진다."

"삶이 힘들어지는 바로 그 때, 밑바탕에 놓여 있는 비극성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뛰어난 진통제로서의 쾌활함이 생성된다."(264면)
"쾌활함은 조롱과 무관하나, 반어와는 관계를 맺고 있다."(266면)

(삶의 기술의 목적)

"성찰적 삶의 기술은 개인이 자신의 힘을 작동시키고 이를 통해 자유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을 때에만 비로소 펼쳐질 수 있다."(287면)

"긍정할만한 가치가 있는 삶은 ‘참된 삶‘이다."(295면)

"삶의 기술은 열거된 관점들을 배경으로 스스로에게 아름다운 삶을 만드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29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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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 - 꼿꼿하고 당당한 털의 역사 사소한 이야기
커트 스텐 지음, 하인해 옮김 / Mid(엠아이디) / 2017년 1월
평점 :
절판


 

<헤어 Hair: A Human History>

커트 스텐(Kurt Stenn) 지음  |  하인해 옮김  |  MID

 

(‘털은 그저 털이 아니었다’)

언젠가 나의 머리카락이 하루에 얼마나 자라는지 궁금했던 적이 있다. 달에 1 cm 정도 자란다고 가정하고 계산했더니, 머리카락은 4 나노미터(nm) 속도로 자라고 있었다. 거리는 DNA 이루고 있는 염기쌍 10 사이의 거리에 해당하는 거리(대략 3.4 nm) 맞먹는다. 분자 크기 세계에서 본다면 머리카락은 매초에 DNA염기쌍 10 사이의 거리에 해당하는 거리만큼 '격렬하게' 세포분열을 단백질 합성을 하여 피부 위로 밀어올리고 있다는 말이다. 두피 아래에서 지금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격렬한 생명현상이 바로 나의 일부라고 생각하면, ‘털은 그저 털이 아니다라는 말이 다시 보이게 것이다.

 

이제 다루게 <헤어> 손에 넣기 전에, 아내가 나에게 야한 생각을 너무 많이 해서 머리카락이 빨리 자라는 같다라고 의심의 눈길을 보낸 적이 있다. 인간이란 존재가 아무리 심신이 유기적인 존재라고 하여도, 과연 생각만으로 단백질 합성 속도가 빨라질 있다는 말이 사실일까? 스트레스에 의한 심리적인 영향이 소화불량, 불면증과 같은 생리적 변화를 야기하는 사실에 비추어보면 전혀 근거없는 말도 아닐 같다. 나는 우선 부당하게 아내로부터 받은 의심의 눈길대신 머리카락의 성장에 대한 진실을 설명하고 아내의 미안해하는 눈빛을 보겠다는 사심가득한 목적을 가지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저자 커트 스텐은 병원 의사이자 과학자로서 평생 털과 모낭을 연구해온 독특한 전공을 가진 인물이다. 책에서 저자는 책을 쓰게 동기를 이발소에서 경험한 일화로부터 말하고있다. 이발사와의 대화 털에 대한 사람들의 무지와 과소평가하는 태도를 보고 지구 위에 사는 존재자로서 털이 갖는 중요성과 의미를 폭넓게 소개하기로 결심한다. <헤어> 크게 3부로 나뉜다. 1부에서는 털에 대한 과학적 배경지식으로부터 풀어나가는데, 털의 구조 성장주기와 같은 생물학적 기초지식에서부터, 진화적 의미, 탈모 등에 대해 알기 쉽게 소개한다. 2부에서 저자는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데, ‘ 자체 대한 인문적 고찰을 하고있다. 무엇보다도 매우 강력한 메시지 전달 수단임을 다양한 측면에서 조명한다. 마지막 3부에서는 털에 얽힌인류사적 측면을 이야기한다. 비버의 털과 가죽을 얻기 위한 인간의 탐욕이 초래한 결과와 영국이 양모 산업의 전모 등을 매우 흥미롭게 이야기해주고 있다.

 

 

(털에 관한 과학적 배경지식)

우선 박사 커트 스텐이 설명하는 털의 역할은 우리 몸에서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 생물이 지구상에 등장하여 지금까지 진화해온 역사를 보여주는 단서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원시포유류인 오리너구리는 조류나 파충류처럼 알을 낳지만, 새끼가 알에서 부화하면 포유류처럼 젖을 먹는다. 오리너구리는 조류, 파충류, 포유류의 유전자를 모두 갖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원시포유류로서 진화의 단계를 지지해주는 증거다. 이러한 진화 단계를 고려하면 생물체와 외부세계를 구별짓는 경계로서의 표피(보호막)’ 어류, 파충류, 조류, 포유류에 따라 다른 형태로 변형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조류의 경우, 표피가 가는 섬유형태로 갈라져 깃털이 반면, 포유류는 바로 형태로 진화했다는 식이다.

 

털에 관한 흥미로운 배경지식을 하나 하나 알아가면서 나의 흥미를 강하게 끌었던 부분은 미스터리한 성장 주기에 대한 부분이었다. 우선 저자는 털의 기본적인 가지 성장주기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털의 성장기에는 진피에 있는 모낭세포에서 맹렬한속도로 세포분열이 일어나는 시기로서 모간() 1달에 1 cm 피부 밖으로 밀려나온다. 다음 단계인 휴지기에서 세포분열은 중단되고 성장이 정체상태에 이르며 머리카락은 피부에 단단히 고정되는 시기이다. 시기가 끝나면 탈락기 이어지는데, 털이 빠진다. 사람은 매일 50-100개의 머리카락이 정상적으로 빠지게 되는데, 시기에 빠지는 머리카락이 탈락기 있는 녀석들인 셈이다.

 

털의 성장 주기를 새롭게 알게되면서 나의 관심을 끌게된 것은 털이 미스테리한 주기를 갖는 경우이다. 예컨대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으면 머리카락이 하얗게 셀 있고, 호르몬에 따라 머리가 벗겨질 있다.”(61) 같은 경우이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바로 뒤에 미국 소설가 애드가 앨런 포의 단편 < 소용돌이에 빨려들어서> 소개하며, 젊은 어부의 이야기 꺼낸다. 젊은 어부는 바다 한가운데서 폭풍우를 만나 밤새 극심한 파도와 싸우면서 하루만에 머리전체가 하얗게 센 이야기를 하는 대목이 나온다. 문득 목소리 소설 알려진 노벨문학상 수상(2015)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어느 대목을 떠올린다. 책에서 저자는 전쟁에 참여한 러시아 여성들의 증언을 기록하고 있는데, 잔혹한 전투 현장에서 극심한 스트레스로 하루만에 머리가 하얗게어버린 여인들의 증언이 나오기 때문이다. 과연 그럴 있을까, 과장은 아닐까 의심했지만, 이런 증언이 건이 아니었다. 커트 스텐은 "드물기는 하지만 의사들은 생명을 위협하는 끔직한 정신적 충격으로 모발이 갑자기 변하는 현상을 목격한다."(63면)라는 점도 덧붙이고 있는데,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의 인터뷰기록을 읽을 때는 어린 러시아 여군들이 받았을 스트레스의 강도를 보여주겠거니 했지만, 어쩌면 이런 불가사의한 일이 실제로 일어날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우선 커트 스텐은 포의 소설 인물을 언급하면서 머리카락이 하얗게어버린 현상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시도하고 있다. 과연 이런 일이 가능할까를 설명하는 사례로 소설 인물을 점은 우선 저자의 설명에 대한 신빙성을 떨어뜨린다. 나아가 하루만에 머리카락이 하얗게어버린 이유로 저자는 엉뚱하게도 스트레스로 인한 원형탈모 원인으로 들고 있다. 죽을 뻔한 고비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대부분의 까만 머리카락이 빠져 하얗게 두피가 드러났다는 설명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인터뷰한 전직 여군들을 인터뷰했다면 과연 원형탈모 이유로 설명할 있었을까?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등장하는 전직 여군들이 전쟁에 참여한 나이대가 대부분 10 후반이었다. 극심한 전투의 스트레스로 하루만에 원형탈모가 일어나 검은 머리카락이 빠지고 하얀 두피가 드러났다라고하면 10 후반의 젊은 여성들이 하루만에 대머리가 되었어야하기 때문이다. 이런 설명은 설득력이 부족해보인다. 커트 스텐은 탈모 관한 이야기로 넘어가기 위한 장치로서 머리카락이 하얗게어버린 젊은 어부를 언급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다른 설명이 가능하지 않을까. 인간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외부의 자극에 민감하고, 인간의 심리적 요인이 신체에 주는 영향이 긴밀하고 직접적인 존재이다. 머리 색에 대한 저자의 설명대로 피부 아래에 있는 멜라닌 색소 전쟁과 같은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색소의 분포에 영향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부분은 당분간 나의 궁금증으로 남을 같다.

 

 

(털의 문화적 기능 메시지 전달 수단)

<헤어> 읽기 전까진 대한 포괄적인 관점을 생각해본 적은 없다. 굳이 오랜 기억을 더듬어본다면, 털에 관한한 단지 단편적인 사례들로서 나의 경험 속에 존재할 뿐이었다. 예를 들어 학창시절 두발 규정에 대한 반감과 삭발 학생에 대한 반항아/이단아로서의 처벌에 대한 기억이 우선 떠오른다. 그리고 빡빡머리 군복무 시절이 있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사회에서 길고 단정하지 못한 , 머리카락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지못하는 메시지를 주었다. 또는 의도적인 장발 세력으로서 60년대 미국에서 유행했던 히피족들을 있다. 이들은 긴머리를 하나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하며 저항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저자는 집단성을 극대화하는 수단으로서 삭발은 비인간화와 정복이라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달한다라고 말한다. 사형수를 처형하기 전에 머리카락을 삭발하는 과정은 사형수로부터 인간다움 흔적을 제거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역사를 거슬러 1431 다르크가 화형당하기 , 1793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에 서기 삭발당한 사례에서 인간다움을 제거하는 과정 분명히 찾아볼 있다. 특히 이렇게 희생당한 대상이 여성 경우, 삭발은 메시지의 잔인함을 더욱 극대화한다고 있다. ‘인간다움의 제거에서 나아가 여성다움의 제거라는 기능이 더해짐으로써 이러한 메시지의 강렬함은 더욱 극적으로 부각되고 있다고 있다. 희생자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삭발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자면, 떠오르는 사례는 나치가 기획한 유대인 절멸 수용소에서 찾아볼 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가해진 나치의 비인간화절차로서 수용되어있던 유대인들에게 동일한 옷을 입히고, 몸에 모든 털을 깎아버림으로써 각자의 개성을 말살한 점을 있다. 같은 옷을 입고, 동일한 머리 모양을 이들을 이름이 아닌 수감번호로 불리며 개성을 박탈당한 집단이 되었다. 유대인 수용소에서 인간이란 존재의 존엄성이 제거된 것이다. 유대인 수용소의 생존자 알려져있는 프리모 레비의 증언으로부터, 공간에서 피수용자들이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자각이 희미해진 상태에 익숙해져가는 상황을 레비의 증언에서 엿볼 있다. 이제 <헤어> 통해 (주로 머리카락) 강렬한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준다는 의미에서 털은 강력한 메시지 전달 수단이라는 관점을 분명히 이해할 있게 되었다.

 

좀더 밝은 이야기를 떠올려보자.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여주인공인 오드리 헵번은 탈출한 공주 연기한다. 하루의 짧은 일탈을 맛보는 고귀한 존재로 등장하는데, 오드리 헵번의 보편적인 이미지는 우아함 있다. 이미지의 형성에 헵번의 헤어스타일이 절대적으로 기여했다고 있다. <로마의 휴일>에서 로마에 국빈으로 머무는 동안 로마 시내로 탈출한 공주는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미용실을 지나치는 장면이 나온다. 공주는 미용실에 들어가 머리를 귀밋머리 단발로 자르게 된다. 미용실에서 머리카락을 자르는 장면은 공주의 변신 대한 욕망을 대변한다. 번쯤 일반인들처럼 거리를 산책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기도 하고 데이트도 해보고 싶다는 소박한 바램이 영화의 장면에 나오는 것이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내면의 여러 자아중에서 자신이 바라는 이상적인 자아를 선택한다는 의미로서 장면의 역할을 상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가 우연치 않게 지나치게 되는 장면이지만 머리카락이 분명한 메시지 전달 수단임을 확인해보는 또하나의 사례가 것이다.

 

 

(인류사에서 털이 끼친 영향들)

인간의 털이 아닌 동물의 털과 가죽을 벌거벗은 인간 이용하게 됨으로써 털을 가진 동물의 수난사는 인류사에서 이미 일찌감치 시작되었음을 <헤어> 보여준다. 16세기에 이미 가장 인기있었다는 비버의 모피교역으로 17세기 서유럽에서 비버가 사실상 멸종되었다고 한다. 인간의 탐욕은 다시 구대륙에서 신대륙으로 눈길을 돌려 북아메리카에서 비버 모피를 유럽에 들여오는 교역이 활발해졌다. 결과 1840년대 이미 북아메리카의 비버 가죽교역은 이미 붕괴하게 되었다. 물론 과정에서 저자는 모피를 찾아 아메리카 원주민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며 누비던 서구인들이 북미 대륙의 지도를 만들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저자의 언급대로 비버를 거의 멸종상태에 만들면서 제작한 지도작성 작업이 인류에 기여 일이라 말할 있을까. 인간의 탐욕대로 숲을 약탈하고 파괴함으로써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의 멸망을 가져왔듯이, 모피를 얻기위해 다른 동물을 수없이 멸종시키고 생태계를 교란시킨 인간에게 장기적인 관점에서 자연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인간은 대용물을 다시 찾아 나설 것이지만 동물들의 털이 인류에 기여했다고 평가하기는 힘들 것같다.

 

인류의 문화에 영향을 끼친 동물털의 예로 저자는 잉들랜드의 양모산업을 이야기한다. 13-14세기 중세 유럽에서 돈이 되는양모 무역은 급속하게 확장되었고, 양모무역을 통해 근대 자본주의의 토대가 마련되었다고 한다. 바로 은행, 금융의 기원이 양모 무역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메디치가가 부를 축적할 있었던 , 신대륙을 발견했던 콜럼부스의 가문이 양모 무역에서 부를 축적할 있었던 배경은 바로 과의 관련성을 다시 조명해주고 있다. 그만큼 중세 말기에 양모무역은 이미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고 이해된다. 보다 흥미로운 점은 잉글랜드의 양모가 오늘날 어떻게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양모 산업의 전통을 갖게 되었는지에 관해서이다. 13세기 궁정의 조직적인 노력으로 플랑드르 지방의 앞선 양모 산업 관련 종사자들을 강제 이주시키고 잉글랜드에 귀화시킨 , 그리고 국가적으로 양모 수출입에 대한 통제등을 통해 오늘날 후손들은 전통있는 양모 산업의 전통을 갖게되었다는 것이다. 이쯤되면 우리는 털이 단지 털이 아님 충분히 인정하고도 남을 일이다. 그만큼 지구상의 모든 동물들에 있어 털은 신체 외부 환경와 내부를 경계짓는 표피의 변형으로서 개체 자체의 생존에 지극히 중요한 존재일 뿐만 아니라, 개체들의 삶에 깊숙히 영향을 주고받는 변수였던 것이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다시 책을 읽기 내가 품었던 사심어린 독서의 목적을 상기해본다. 머리카락이 야한생각을 많이 해서 빨리 자라는 아님을 주장할 있는 단서가 있을까. 저자는 모발의 성장을 남성호르몬의 안드로겐이 주는 영향과 견주어 언급하는 대목은 보인다. 일단 안드로겐 농도가 급상승하는 사춘기에 2 성징으로서 음모와 겨드랑이와 다리에 털이 나는 뿐만 아니라 털이 두꺼워지는현상을 말하고 있긴 하지만, 모발이 빨리 성장하는 것에 관한 언급은 분명 찾아볼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야한 생각하기라는 심리적 동인이 생리적으로 어떤 변화를 야기하는지 확신할 있어야하는데, ‘야한 생각을 많이 하는 안드로겐의 분비와의 관계에 대해 연관성을 찾기 힘들다. 오히려 야한 생각을 많이 머리카락의 빠른 성장 대한 아내의 비난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이렇다. 머리카락은 사람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오히려 탈모 진행되거나 남성호르몬인 안드로겐이 불균형하게 분비되도록 영향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야한 생각을 하는 행위 모낭 하부 세포의 세포분열을 더욱 빠르게 하여 단백질을 빨리 합성한다는 말보다(단백질 합성 속도의 상한선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극심한 스트레스 상태로부터 벗어나게 해줌으로써 탈모 확률이나 남성호르몬의 불규칙한 분비 가능성을 극소화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야한 생각을 하는 행위 머리카락을 빨리 자라게 해주지는 못해도, 머리카락의 성장에 제한이 가거나 호르몬 분비가 불규칙하게 분비되어 성장 저해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머리카락의 지속적인 성장을 보장해준다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정상적인 머리카락의 성장 속도를 방해하지 않음으로써 (각종 스트레스 환경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으로서)우리가 머리카락이 빨리 자란다 인식할 있지 않은가.

 

하나, 남성중심적인 신경과학의 연구결과 편견을 비판한 심리학자 코델리아 파인의 저서 <젠더, 만들어진 >에서도 언급하듯이, 과학의 급속한 발달로 현대 신경과학 분야는 fMRI 같은 뇌활동부위 영상을 많이 보여주고 있다. 코델리아 파인이 비판하고 있는 바대로 뇌에서 일어나는 활동부위에 대한 기록을 심리적으로 해석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야한 생각에 의한 머리카락의 성장 결부지어볼 있을 것같다. 다시말하면 뇌활동 전위를 기록한 자료만으로 피검사자가 무슨 생각을 했으며 어떤 심리적인 반응에 기인했는지 소급해서 심리적인 원인을 찾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다시 정리하면, 나의 머리카락이 매우 자란다고 하더라도 사실이 내가 야한 생각을 많이 이라는 심리적인 동인 하나로 소급해서 지적할 수는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오히려 야한 생각을 많이 한다면(나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바쁜 일상생활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줄이거나 벗어남으로써 탈모예방이나 불균형적인 호르몬 분비 문제를 예방할 있다고 보는 것이 더욱 설득력있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오히려 야한 생각을 함으로써 건강한 모발 지키는데 오히려 도움이 수도 있지 않은가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주장일 수는 있지만, 아내의 비난에 대한 나의 입장은 이렇다.

 

 

<헤어>를 읽고 받은 인상을 다시 떠올리자면, 털은 그저 불필요하게 신체에 난 존재가 아니라, '나'라는 개체가 인간이라는 종의 계통이 겪어온 진화 과정의 흔적을 보여주는 존재라고 할 수 있겠다. 아울러 인간의 문화가 발생한 이래로, 털은 매우 강력한 메시지를 담는 수단으로서 기능하였다는 점을 상기해본다. 나아가 '벌거벗은 원숭이'로서 다른 동물의 털과 가죽을 이용하기 위한 인류 욕망의 대상으로서 털과 관련한 경제활동은 인류 역사의 무대에서 중심적인 기능을 수행해왔다고 보아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메시지 전달 수단으로서의 털에서 더 나아가 DNA라는 인간 고유의 정보를 담고 있는 머리카락은 현대에 이르러 새로운 정보를 지닌 수단으로서 중요성이 재평가되어야할 것 같다. 털은 그저 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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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권 독서법 - 인생은 책을 얼마나 읽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인나미 아쓰시, 장은주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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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권 독서법>

인나미 아쓰시 지음 | 장은주 옮김 | 위즈덤하우스

 

독서를 하면 좋다는 것에 반대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잊을만 하면 대중매체에서 평균적으로 우리가 얼마나 책을 읽지 않는지 성토하는 기사가 눈에 띈다. ‘책을 많이 읽어라라는 말은 많이 들리고, 소위 인문학 열풍 불기시작한지 지나도 여전히 비슷한 기사들만 반복해서 나오고 있다. 언론에서는 거의 매일같이 ‘4 혁명 이야기하고, 우리는 무한에 가까운 정보의 바다에 언제든 접근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 성인 평균 독서량이 달에 0.8권에 그치고 있다는 식의 기사만 여전히 나오고 있다. 야근을 밥먹듯이 해야하고, 주말에도 회사에 나가는 이들이 많은 대한민국 사회에서 책을 읽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새해를 맞아 올해는 책을 좀더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만 하지 달이 지나고 달이 지나면 여전히 작년과 같은 생활 패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허덕이는 나를 발견한다. 마치 언덕아래로 굴러떨어진 돌을 끊임없이 언덕위로 밀어올려야하는 시지포스의 신화처럼 무기력의 무한궤도에서 벗어나기 힘든 나를 발견할 뿐이다.

<1만권 독서법> 내가 책을 좀더 효과적으로 읽을 있는 방법은 없을지, 다른 독서의 고수들은 어떻게 책을 읽을지 궁금하던 차에 발견한 책이라서 단숨에 읽게 되었다. 저자 인나미 아쓰시는 일본에서 서평가로 활동하면서 하루에 이상, 평균 2권에 대한 서평을 쓰면서 자신의 경험을 간결하게 정리하여 소개하고 있다. 아쓰시는 정보화시대 넘어 정보과잉시대에 어떻게 책을 읽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독서 행위 대한 발상의 전환을 책에서 이야기 한다. 나아가 저자는 책을 읽는 방법에 대한 언급 뿐만 아니라 독서 행위 대한 의미나 바람직한 독서 습관, 독서 , 글쓰기(서평쓰기), 고르기 관리, 처분하기 등에 관해 간결하게 서술하고 있다.   

우선 저자인 아쓰시는 독서법에 대한 고정관념에 의문을 제기하며 책을 시작한다. 과연 정독만이 독서하는 유일한 방법이 있을까? 아쓰시는 정독 대한 속박이 잘못된 학교 교육의 저주라고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따라서 정보가 넘처나는 시대에 저자는 속독 기술이나 안구 운동에 대한 테크닉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느리게 읽는 독서가 어떻게 많은 책을 읽을 있을 것인지를 고민하고 있다. 그렇다면 수많은 책들을 읽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저자는 각각의 책에도 적절히 읽는 속도가 필요하다고 진단하며, 모든 것을 기억하려는 욕심을 버리라고 말한다. 이른바 플로우 리딩으로 기억해두려고 담아두지 말고 자신의 내부로 흘러드는 것에 가치를 두는 독서법을 제한하고 있다.

 

(책읽기와 글쓰기 숨쉬기(들숨과 날숨) 비유)

아쓰시가 제시하는 속독법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책읽기는 숨을 쉬는 행위와 같다는 대목은 상당히 인상적이고 설득력이 있다.

숨을 들이쉬기만 해서는 생명을 유지하는 호흡을 없는 것처럼 너무 많은 양을 읽기만 해서는 건강한 독서생활이라 없다.”(59)

따라서 읽기(들숨) 것이 아니라 쓰기(날숨) 과정을 병행할 것을 제시한다. 쓰기의 과정에는 독자가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구절을 만나면 암기하려고 하지 말고 옮겨 쓰는 필사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과정에서 정보의 재구축과정이 일어나고, 책으로부터 자신만의 에센스를 뽑아 두어 자신이 만든 요약집을 갖게 된다면 이는 책을 읽으며 자신이 들이쉬고 내쉬는 모든 것을 담는 독서를 하게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결국 독자의 적극적인 참여(쓰기와 에센스가 되는 문장의 취사선택) 동반되는 독서과정을 하게되고, 이것이 결국 빠르고 깊게 읽는 독서법이라는 것이다.

 

밖에도 저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간결하게 정리해낸 자신만의 독서팁들이 소개되어 있는데, 핵심적인 사항이 바로 키워드 독서법이다. 방법은 우선 책을 읽을 자신이 목적을 분명히 인식하고, 머리말과 차례를 읽어 전체의 흐름을 파악한 키워드를 정해 읽는 적극적인 독서법이다. 키워드 검색법을 적용하면 키워드와 연관성이 적은 부분은 넘겨 읽거나 빠르게 읽어나가고, 키워드가 포함된 부분은 필사 해두면 된다. 한가지 팁은 책을 읽으며 책에 밑줄을 긋지 말라고 저자는 조언한다. 사실 지금까지 많은 독서의 고수들이 적극적으로 책을 읽는 방법으로서 독자가 인상적인 구절을 만나면 밑줄을 긋고, 여백에 노트를 하라는 말을 많이 하곤한다. 하지만 어떤 독서의 고수는 이렇게 하지 말라고 조언하는 사람도 있어서 혼동이 되기도 한다. 과연 어느 것이 나에게 적합한 방법인지는 정답이 없는 문제 같다. 다만 저자인 아쓰시는 밑줄 긋기 무의미한 활동으로 대부분 다시 보지 않으며, 자기 만족으로 끝나게되는 행위라고 말하고 있다. 어느 쪽이나 맞고 틀린 방식이 아니라 자기에게 맞는 방식을 찾아가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책과의 만남과 헤어짐에 대해)

<1만권 독서법>에서 흥미로웠던 점은 독서에 대한 고민 뿐만 아니라 좀더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저자의 고민과 경험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점이다. 저자는 하루에 이상 책을 읽고 서평을 쓰는 서평가로서 수많은 책을 관리하고 처분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조언을 하고 있다. 특히 수많은 책을 어떻게 내보낼 것인가하는 문제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갖는 고민거리일 것이다. 저자는 책의 처분을 어떻게 하며, 기준은 무엇일까. 아쓰시는 불필요한 책을 처분하면 비로소 필요한 책이 보인다."(146)라는 기준을 내세운다. 책읽기나 책관리 모두에 있어서 플로우로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소유하기보다는 나를 거쳐서 내보낸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읽다 책으로 2년이 넘은 책들은 다시 읽지 않을 가능성이 크므로 처분기준에 들어가고, 오래된 책이라 시대에 맞지 않는 책을 우선적인 처분 대상으로 삼는다. 만약 망설여진다면? 저자는 책과 언제든 다시 만날 있음 의식하라고 조언한다. 책과의 인연을 고려한 현실적인 조언이다. 그리고나면 남은 책장은 3개월 마다 정리하여 남길 책을 정한다. 3개월 전에 남기기로 판단도 지금 어떻게 바뀌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독서가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책을 버리느냐가 아니라 어떤 책을 남기느냐에 있다.”(155) 어디에서 읽었는지 출처는 기억나지 않지만, 소설 <연금술사> 작가 파울로 코엘료의 서재 정리에 대한 부분이 기억난다. 작가 코엘료는 자신의 서재에 400 정도의 책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팔거나 기증한다는 것이다. 아마 코엘료는 책의 저자 아쓰시의 서재 관리에 인상을 주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정말 필요한 만을 남겨도 충분하다는 점이다 

 

(정리)

결론적으로 말해 <1만권 독서법>에서 저자인 아쓰시가 1년에 700권의 책을 읽는 방법의 대상으로 삼은 책은 제한적이다. 저자가 말하는 빨리 읽을 있는 경영서, 자기계발서에 한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설, 에세이와 같은 플롯을 갖는 스토리물은 책에서 제시되는 속독의 대상이 아니다. 저자는 책에서 언급하는 속독의 대상이되는 책을 분명히하고 있으며 모든 책을 빨리 읽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지금까지 수많은 독서고수들이 언급했듯이, 꼼꼼하게 읽어야할 책이 있고, 빠르게 건너 띄고 핵심만 점검하며 읽어나가도 되는 책이 있다. 판단은 결국 독서과정에서 독자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한 부분이다.

아울러 책이 독서법에 관해 언급하는 다른 서적과 다른 점은 저자의 균형잡힌 시각이라고 생각한다. ‘하늘 아래 새로운 없다라는 말도 있듯이 책에서 제시되고있는 속독법들은 일본의 다독가인 다치바나 다카시나 독서광인 장석주 시인등이 언급한 내용들과 많이 겹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어떤 방법론을 이야기하는 책들이 흔히 하는 실수가 저자의 방식을 마치 진리인 것처럼 소개하고 있거나 강요한다는 점인데, 책에서 저자는 자신의 방법을 소개하되 여러 가지 경고 주의사항을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는다. 예컨데, 저자는 다독을 있는 속독의 팁을 이야기하면서도 지식만을 위한 독서는 위험하다고 경고하는 것이다. 결국 무언가를 위한독서 자체가 목적이 되지 않을 것을 우리에게 환기시키고 있다. 아울러 책에서 언급하는 속독의 대상이 되는 경영서나 자기계발서가 아닌 문학서적이나 철학서적과 같은 빨리 읽기 어려운 들은 빨리 읽을 있는 책과 병행하여 읽고, 특히나 시간을 요하는 책들은 독서계획에 들어있지 않은 쉬는 읽으라는 현실적인 조언까지 잊지 않고 있다.   

다시 책을 덮으며 돌이켜보면 느리게 읽는 독서가였던 저자 인나미 아쓰시는 빠르게 읽을 있는 들에 대한 책읽기의 팁을 전해준다. 아울러 생각해볼만한 독서의 가치 전하며 독서와 관련된 전반적인 사항들을 포괄적이면서도 간결하게 전달하고 있다. 책의 전체 흐름을 파악하는 , 머리말과 목차를 꼼꼼하게 살펴보라는 저자의 조언대로 책의 목차를 다시 살펴보았는데 개인적으로 판단하기에 상당히 공을 많이 들여 짜놓은 목차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소설이 아닌 정보를 전달하는 책들도 종종 목차를 보고 전체의 흐름을 파악하기 힘들만큼 소홀하게 작성하거나 정보가 부족한 책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자기계발서를 많이 읽지는 않지만, <1만권 독서법> 나의 선입견을 깨고, 보기보다 마음에 드는 책이었다. 특히 균형감있고 합리적인 저자의 견해에 공감을하게 되는 부분이 많았다. 다만 아주 새롭고 놀라운 사실이나 팁을 전달하는 것은 아니 었고, 독서법의 대상이 되는 책의 범주가 매우 제한적이라는 점이 다소 아쉬운 부분이었다.

 

마지막으로 저자인 아쓰시의 조언대로 책에서 내가 만난 인상적인 문장을 고르라면 다음과 같다.

독서의 진정한 가치는 책의 내용을 전부 머릿속에 기억하는 있는 아니라 가치를 느낄 있는 1퍼센트를 만나는 있다.” (23)

어느 책에서 하나의 강렬한 인상을 받고, 책을 읽기 전과 읽은 후의 내가 달라져있다면 분명 책은 책장에 오래 남아있게 것이다. 앞으로의 독서계획에 책의 조언이 여러 모로 도움이 것이다.

 

 

 

 

(23면)
"독서의 진정한 가치는 책의 내용을 전부 머릿속에 기억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가치를 느낄 수 있는 1퍼센트를 만나는 데 있다."

(67면)‘한 줄 리뷰‘쓰기에 대해
"최고의 문장에 마음이 움직인 이유를 기록한다."

곧 저자는 독자가 만난 인상깊은 문장에 대해 감동받은 이유를 써보라는 조언으로 감상문 쓰는 습관 들이기를 권하고 있다.

(84면)
"쓰면서 읽어야 빠르고 깊게 읽을 수 있다."

저자는 ‘소유하지 않는 독서법‘을 말하면서 마음에 드는 구절을 암기하지 말고 그대로 옮겨 써보는 것으로 시작해보라 조언한다.

(115면)
"외우지 않아야 잊지 않는다."

이 말도 곧 같은 맥락에서 외우지 말것을 주문한다.

(131면)
"책읽기의 진정한 묘미는 새로운 관심이 피어나는 순간에 있다."

내키지 않는 책도 읽어서 좋았던 부분이 대부분 있다. 책에서 이 1퍼센트의 가치를 찾으면 될 것이다.

(149면)
"관리할 수 있을 만큼의 책을 소장하고 자주 환기하는 것이 가장 좋다."

책 관리와 처분에 대한 저자의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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