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하는 인간의 철학 - 호모 루덴스를 위한 철학사
정낙림 지음 / 책세상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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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하는 인간의 철학>

: 호모 루덴스를 위한 철학사

정낙림 지음 | 책세상

 

우리 인간에게 놀이 본질적인 특성일까? 나는 놀이하는 인간 의미를 담고 있는 호모 루덴스에 관한 고찰을 담고 있는 책을 집어들며 제일 먼저 들었던 생각이었다. 지난 신문을 보니 흥미로운 뉴스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독일 연구소의 연구팀이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호모 사피엔스의 존재보다 무려 10만년이나 오래된 호모 사피엔스의 뼈를 모로코에서 발견했다는 소식이었다. ‘직립인으로 이해되는 호모 사피엔스는 발로 무게 중심을 잡고 걸어다니며 손의 자유를 얻었으며, 엄지의 독특한 구조로 도구를 단단히 잡고, 섬세한 가공을 있는 매우 독특한 존재이다. 다시말하면 지난 주에 발표된 연구결과가 사실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놀이 그토록 오래된 것일까라는 궁금증이 따라온다. 이번에 만나게 <놀이하는 인간의 철학> 읽으며 책에 또는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은 바로 호모 사피엔스에게 놀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였다.

     철학을 전공한 저자 정낙림 박사는 놀이라는 의외의 주제에 관심을 두게 것이 학위 지도교수의 영향이라 밝히고 있다. 오랜시간 놀이라는 주제에 대해 천착해왔고, 니체의 저서 제목과 유사한 지도교수의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렇게 말했다> 통해 니체가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 하나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를 언급하며, <놀이하는 인간의 철학>과의 인연을 밝히고 있다. 책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놀이 대한 태도 내지는 관점에 대한 치밀한 논의를 시작으로 플라톤이 헤라클레이토스의 긍정적인(것으로 해석되는) ‘놀이 대한 입장과 달리 놀이 대해 다소 부정적, 제한적인 견해를 갖고 있음을 소개한다. 나아가 근대 사유에 영향을 사람들인 칸트와 실러가 놀이 수단적인 가치로 보는 견해에서 벗어나지 못한 반면, 니체와 하이데거가 놀이 하나의 주체로서 새롭게 주목하였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다음 다시 놀이에 대한 가다머와 핑크 그리고 비트겐슈 타인의 유희 대한 견해를 소개하고나면 저자가 많은 시간을 연구하느라 할애했을 것으로 보이는 니체의 예술생리학 소개와 함께 현대 예술미학에 어떤 놀이 흔적을 발견한 있는지를 정리하는 흐름으로 되어 있다. 이번 글에서는 개의 부로 나누어 1부에서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놀이 대한 견해를 문헌을 통해 해석하기 위해 추적하는 과정을 따라가보며, 근대의 문을 철학자들인 칸트와 실러가 놀이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이해해보려고 하였다. 2부는 사실상 책의 핵심적인 부분인 니체, 하이데거의 놀이 대한 관점을 다음 글에서 좀더 이해해보려고 한다.

     단적으로 말하면 책은 저자가 심혈을 기울여 고민하고 정리한 놀이 대한 다양한 고찰을 담은 학술서라고 있다. 다양한 철학 거장의 개념이 등장하고 이들의 관점이 텍스트로 표현되어 이들이 놀이라는 맥락에서 치밀하게 비교되고 있는만큼 눈에 이해될 것이라고 기대하진 않았다. 나에게 어려운 책인 만큼 보다 천천히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려고 했다. 온전히 이해가되지 않은 내용에 대해 쓰려고 고민하지는 않겠다. 다만 책을 읽어가면서 새롭게 발견하게 사항들과 즐거움을 이야기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다소 머리는 아프지만 놀이 관한 철학책을 놀이하듯 읽어나가면 되지 않겠는가. 책을 읽어가다 흥미로운 부분이 나오면 멈추고 옆길로 새어 생각을 하기도하고, 언젠가 다시 돌아와 읽을 때는 나의 지혜가 성장하여 좀더 이해가 깊어질 것을 믿으며 넘어간다. 저자가 언급하는 다른 철학자의 책들을 뒤적여 보며 찬찬히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는 재미는 나에게 하나의 놀이과정이었다. 나에게 책은 여러 철학자들의 사상이 놀이’, ‘예술’, ‘미학 관점에서 서로 충돌하고 만나는 다접점의 공간을 보여주었다. 다시 책에 소개된 철학자, 사상가들의 이름을 살펴보면 놀이 관해 주목한 독일() 철학자들의 계보임을 느낄 있다. 물론 저자가 철학적 전통이 강한 독일에서 공부한 원인일 수도 있겠으나, 그만큼 독일철학이 놀이-현대예술에 대해 갖는 관념적 해석의 전통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오늘날 관념적이고 철학적 성격이 매우 강한 개념예술의 메카가 독일 베를린이라는 점도 놀이라는 주제에 대해 천착한 독일철학의 전통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이해할 있겠다.

 

고대 그리스인의 놀이철학          

     고대 그리스 철학자가 둘이 아닐터인데, 헤라클레이토스와 플라톤 사람만을 언급하며 고대 그리스인이라고 통칭하기에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다만 놀이라는 관점에서 사람이 세계에 미친 영향은 적지 않을 것이며, 문헌이 충분히 남아 온전한 이들의 철학을 파악하기 힘들기에 본질적으로 제한적일 수밖에는 없겠다. ‘플라톤 이후의 서양철학은 그의 주석에 불과하다라고 화이트헤드가 말했다고 했던가. 아마도 놀이 대한 관점에서는 화이트헤드의 간결한 표현이 적절할 듯하다.  놀이에 대해 플라톤이 갖고 있던 제한적, 부정적인 견해는 이후 많은 이들에게 놀이의 평가절하현상에 분명히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플라톤에게 놀이는 어린 아이들에게만 교육적 목적으로 적용되는 제한적인 의미만을 가진 듯하다.

“(플라톤에게 있어) 놀이는 대상에 대한 재현활동으로 진리와 무관할 뿐만 아니라 영혼을 감각적으로 치우치게 하여 젊은이를 타락시킨다.”(97)  

하여 시인을 공화국에서 추방해야한다니!

     플라톤에 인간의 감정 욕망이란 불길한 대상으로 비쳐진 모양이다. 온전한 진리를 파악하는데 방해가 되는 존재로서 말이다. 그리고  놀이 바로 감각적인 쾌락 근거한 것으로 진리 추구와는 거리가 있는 행위라는 것이다. 숱한 전쟁과 영아살해의 시대에 살았던 플라톤에게 놀이 미숙하고 쓸모없는 아이라는 존재에게만 교육적으로 필요한 수단으로만 받아들여졌을 것같다. 플라톤에게 있어 장애가 있거나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않거나, 혹은 어떤 역할에 적합하지 않은 아이는 말그대로 도태시켜도 상관없는 존재였을 것이다. 이런 플라톤에게 아이들이 보여주는 미성숙함, 숱한 실수를 통해 배우는 과정은 중요하게 보지 않았을 것같다.

   이에 반해 헤라클레이토스의 놀이 대한 관점은 여전히 정해지지 않고 논란의 여지는 있으나, 오히려 긍정적인 해석의 가능성을 담고 있음에 놀라게 된다. 보다 면밀한 헤라클레이토스의 놀이철학은 다음 글에서 보다 찬찬히 저자의 생각을 따라가볼 것이지만, 저자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놀이철학은 긍정적일 있음을 조심스럽게 암시하고 있다. 근거는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의 다음과 같은 전언때문이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번잡함을 피해 아르테미스 사원에서 아이들과 장기놀이를 즐겼다.”(78)

     이런 가능성도 생각해본다. 플라톤의 <향연>에서 암시적으로 드러나듯 당대의 남자철학자들이 어린 남자아이( 책에서 pais라고 언급되는 사내아이’) 동성연애적 향연 즐겼다는 점을 고려해볼 , 헤라클레이토스도 이들 하나였고, 아이들과의 장기놀이 긍정적으로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말하자면 헤라클레이토스도 당대 문화와 시대성에 종속된 존재이기에 플라톤과 유사하게 놀이에 대해 제한적인 가지면서도, 긍정적으로 표현한 아이와의 놀이 대해 복합적인 감정을 갖고 대하지 않았겠는가 하는 점이다. 이유는 헤라클레이토스가 남긴 조각글이 상징적이고 은유적이므로 해석의 다양성을 허용한다.’(45) 저자의 언급때문이다. 

     다른 흥미로운 부분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 B52 해석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는 대목이다. 해석의 다양성을 허용하는 부분인 만큼 부분을 해석하는 다양한 견해들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다. ‘왕국이 아이에 속한다 B52 마지막 부분의 해석문제는 자체로 유희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물론 책을 읽어나가는 과정은 더디지만 나에게 이러한 유희는 보기드문 호사이기도 하다. 물론 나는 전문가는 아니지만 또한 놀이 과정으로서 해석에 동참해보기도 하였다. 과연 왕국 뜽금없이 여기에 나왔을까. 그리고 아이 저자의 말대로 은유적인 표현일까. 점점 의혹과 질문만 던지다 미궁에 빠진다. 하지만 재미있기도 하다. 내가 이해하는(마구잡이로 추측해낸 해석) 이러하다. 장기놀이하는 아이에게 장기판은 규칙을 따르면서도 우연성이 존재하는 하나의 축소된 세계이다. 반면 말을 조종하는 아이는 세계의 창조자 조종자이자 된다. 나아가 놀이에 몰입 아이에게 축소된 세계는 진실이며 세계가 전부가 된다. 다시말하면 장기놀이에 몰입하는 아이에게 세계는 전부이다. 왕국은 전적으로 아이의 것이 아니겠는가. 너무 당연한 해석일까. 여기에 장기놀이하는 아이의 원형이 <일리아드> 아폴론이라는 베르나이스의 해석(66) 어쩌면 지나친 지적 호사가 아닐까 나혼자 반격해보기도 한다. 이런 나의 엉뚱하고 무례한 생각들을 돌이켜보면 놀이의 사회성 언급하면서 오늘날의 토론’, ‘논쟁 놀이적 성격이 강하게 남아있다(21) 저자의 지적이 이해되기도 한다.           

 

근대 철학자들이 놀이

      플라톤 이후 부정적인 관점으로 받아들여진 놀이 중세를 지나 근대를 시작하며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한다. 저자는 부분에서 칸트와 실러를 불러들인다. ‘놀이 갖는 위상의 변화가 근대에 이루어지기 시작했음은 기독교가 절대적으로 지배했던 중세를 지나 미학 신학과 형이상학으로부터 분리되었기 때문이라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미학이라고 이야기하는 아름다움에 관한 견해를 다루는 분야는 근대에 정립된 개념으로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칸트와 실러의 놀이 대한 세세한 철학과 입장은 온전히 이해되지 않음을 인정해야겠다. 다만 놀이 대한 입장이 칸트에 있어서 제한적이고 하나의 수단으로서만 기능한다는 , 그리고 칸트의 놀이철학을 비판적으로 계승했다는 실러도 결국 놀이 수단으로서의 위상을 극복하지 못했다고 정리하는 것으로 만족해야겠다. 문득 칸트에게는 놀이 미에 대한 판단 어떤 관계를 가질까가 문득 궁금해진다.

칸트는 미에 대한 판단이 상상력과 지성 사이의 조화와 일치에서 성립한다고 본다. 상상력과 지성이라는 이질적인 인식능력이 자유롭게 우연히 일치하여 획득되는 것이 바로 미적 쾌감이며,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놀이이다.”(108)     

     칸트에게 미에 대한 판단 상상력과 지성이라는 인식능력의 조화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며 이를 매개하는 수단 바로 놀이라는 점이다. 수단으로서의 놀이가 갖는 위상은 여전히 실러에게도 나타난다고 하였다. 인간은 오직 그가 말의 완전한 의미에서 인간일 경우에만 놀이하며, 놀이할 경우에만 온전한 인간이다.”(159)라는 대목에서처럼 칸트의 놀이에 관한 관점 보다 놀이를 진지하게 놓고 역할을 인정하는 보인다. 다만 실러의 놀이 철학도 분열된 인간의 총체성을 회복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위상에 한정된다는 비판을 받는 듯하다.

     다른 흥미로운 부분은 칸트가 미에 대한 자율성의 확보 관해 설명한 대목이다. 칸트에 따르면 미에 대한 자율성은 주관적 보편성 통해 가능하다고 하였다. 미에 대한 판단이 어떤 대상을 바라보는 이의 주관적인 느낌과 감정에서 출발하지만 동시에 타자의 보편적 동의를 획득할 있다고 보았다는 점이다. 나에게 부분이 특히 흥미롭다. 부분이 롤랑 바르트가 자신의 <밝은 >에서 언급한 사진미학에 관한 관점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어머니 사진을 바라보며 다시 만나게 어머니에 관한 추억들은 분명 어머니의 어린 시절을 담은 순간과 분리되어 있다. 하지만 어머니의 사진을 바라보며 느끼는 주관적인 느낌과 어머니에 대한 감정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출발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롤랑 바르트 어머니의 사진을 보며 느끼게 되는 감정들은 동일한 과거의 사건으로부터 연유될 없다. 이러한 감정들은 지극히 개인적, 개별적인 체험에 바탕을 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기억으로부터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소환하며 다시 어머니와 만날 있다. 따라서 칸트가 말하는 타자의 보편적 동의 물론 동일한 내용(기억) 대한 보편성을 의미하기 보다는  어머니의 기억을 되살리고 어머니와 만난다는 형식의 동일성에 보편성의 근거를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점을 떠올려보면 칸트가 언급한 주관적 보편성 개념은 현대의 사진미학에도 적용될 있는 부분이 있다고 있지 않을까.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에도 암울하게 그려지고 있듯이 유럽 자본주의의 발달과정에서 일어나는 노동분업과 그에 따른 인간의 소외문제는 이미 프리드리히 실러도 주목한 모양이다. 분업과 전문화의 과정을 통해 반쪽짜리 불구가 되어버린 인간에게 본래의 건강함(실러의 표현으로 인간의 총체성) 되찾기 위해서는 예술을 통해 가능하다는 주장은 아마도 모든 미술학원 경영자들이 가장 좋아할 표현일 것이다. 독일의 문호라고 불리는 괴테와 오랜 교류를 것으로 알려진 프리드리히 실러가 실추되는 인간에 주목한 것은 어쩌면 충분히 이해가 되는 면이 있다. 칸트와 다소 다르게 느껴지는 점은 인간성을 획득하기 위한 교육적 방편으로 훈육 필요함을 말한 점이라면, 실러는 이성과 감정에 기반한 충동을 조화/제약하기 위한 방편으로 문화와 교육, 중에서도 예술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국내에서도 많이 주목을 받고 있는 독일의 교육이념인 발도로프 교육도 어쩌면 실러와 같은 독일 철학자들의 인간에 대한 이해에 많은 빚을 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기도 한다. 예를 들어 교실의 색깔을 괴테의 색체론에 근거한 6가지 색상을 적용하고 있는 사실에서도 철학적 전통을 짐작해볼 있다.

 

1 마무리

      다음에 쓰게 2부에서는 보다 본격적으로 현대철학에서 놀이 어떤 경위로 새롭게 해석되게 되었는지를 놀이하듯살펴볼 생각이다. 여러 현대 철학자들의 놀이 대한 관점을 살펴보게 것이고, 끝으로 현대 예술에서 놀이 특성을 확인하는 작업이 것으로 보인다. 학술서이긴 하지만 책이 제공하는 흥미로운 점은 놀이라는 관점에서 새롭게 여러 철학자들의 관점이 접접을 갖기도하고 대립을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달리 보면 각각의 철학자들을 다시 접하게 , 이들의 철학을 이해하는데 보다 깊은 이해를 제공해줄 있겠다는 점이다. 플라톤이 그러하고 니체가 그러하다. 예컨대 <놀이하는 인간의 철학> 통해 이진우 교수의 <니체의 인생 강의>에서 니체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전통을 따른다 표현의 이유에 대해 보다 설득력있는 이해를 있다. 또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나오는 낙타-사자-아이의 비유에서 아이 갖는 의미에 대한 보다 설득력 이해를 책이 도와줄 있을 것이다. 출판사의 광고대로 2500년을 아우르는 놀이의 철학을 번의 독서로 이해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나에게 책은 철학자의 저서를 읽을 옆에 두고 다시 돌아와 찾아볼 있는 그런 책이다. <놀이하는 인간의 철학> 쓸모없다고 오래도록 여겨진 놀이 대한 발견과 재발견의 철학사를 책에서 다룬다. 그리고 현대예술은 쓸모없음의 쓸모를 증거하고 있다. 다음 글에서는 우리에게 보다 가깝게 느껴지는 현대철학에서 놀이 어떻게 해석될 있는지 이해해보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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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죽음을 마주할 것인가 -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한 임종학 강의
모니카 렌츠 지음, 전진만 옮김 / 책세상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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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죽음을 마주할 것인가>

모니카 렌츠 지음 | 전진만 옮김 [책세상]

‘죽음’에 대하여

 

    ‘죽음’이란 주제는 지구 상의 모든 생명체가 맞이하는 유일하고 확실한 운명일 것이다. ‘사랑’과 ‘죽음’은 아마도 인간의 인지능력이 여타의 동물과 달리 창발되어 드러난 이후 언제나 우리의 속에 함께하는 주제가 아닐까한다. ‘사랑’은 역사상 수많은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이야기하고 논했던 주제인 반면, ‘죽음’은 어쩐지 우리가 회피하고 막연하게 다가오는 것도 이상할 것은 없을 같다. ‘죽음’은 본연의 실체를 모르기에 더욱 공포스러운 생명체의 운명이다. <어떻게 죽음을 마주할 것인가> 저자 모니카 렌츠는 스위스 동북부에 위치한 장크트갈렌St. Gallen 종합병원의 정신종양학 의사로서, 그리고 임종을 앞둔 환자들을 대상으로 음악치료에 관심을 갖고 있는 심층 심리학자로서 활동하는 죽음 전문가라고 있다. 저자가 17 1000 명의 죽음에 이르는 환자들을 지켜보고, 경험한 점들을 바탕으로 책이 바로 <어떻게 죽음을 마주할 것인가>이다.

 

     우리는 누구나 태어난 이상, 언젠가는 ‘죽을 운명’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언제 죽음을 맞이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죽음에 대해 어느 누구도 모른다는 점이 ‘죽음’에 대해 갖게 되는 공포일 것이다. 어느 누구도 죽음의 실체에 대해 모르는 것은 저자가 지적하는 대로 우리의 죽음이 지극히 ‘개별적’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읽은 중에 몽테뉴의 에세이 형식을 닮은 빌헬름 슈미트의 철학서 <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에서도 ‘죽음’에 대한 언급이 보인다. 죽음은 솔직함의 극단적 지점이며, 이상 회피를 용납하지 않는 진리의 순간이다.”라고 하였다. 누구나 피할길 없는 자명한 운명은 지극히 개인적이긴 하지만 언젠가는 누구나 마주해야하는 대상이다. ‘안락사’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하는 현대 사회의 분위기는 바로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하는 물음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저자 모니카 렌츠는 서문에서 ‘안락사’에 대한 개념을 여러 가지 유사 개념들과 함께 구분해 놓고 있다. 생명유지가 무의미한 상황에서 생명 연장을 위한 조치들을 포기하는 ‘소극적 안락사’와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약물을 투여하여 ‘생명’을 인위적으로 단축하거나 거두는 ‘적극적 안락사’, 그리고 의료진으로부터 약물을 직접 처방받아 환자 자신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조력 자살’ 행위도 있다고 한다.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쉽지 않은 문화적 맥락에서 ‘안락사’는 논의를 꺼내기 쉽지 않은 주제다. 나아가 가족 명이 ‘안락사’를 이야기 한다면 더욱 힘겨운 주제가 것이다. 현재에도 특별한 시대적, 문화적 맥락 속에서 ‘안락사’는 금기시 되는 단어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독일에서 ‘안락사’는 금기시되는 단어라고 어느 교수로부터 들었던 적이 있다. 바로 나치가 권력을 잡던 시기에 아우슈비츠와 같은 집단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보내는 일’이 ‘안락사’라는 단어와 결부되어 사용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독일 나치의 광기어린 지도층에게나 ‘안락사’라고 말할 , 정작 대상이 되는 수용되어 있던 유대인들에 대한 고려와는 전혀 무관한 표현이었다. 이처럼 말을 꺼내기조차 쉽지 않은 ‘안락사’를 언급하기도 하며 저자가 말하려던 의도는 무엇보다 ‘존엄’에 대한 질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여타의 동물과 다른 인간의 ‘존엄’이라는 것이 있는가? 그리고 인간의 마지막 모습에 ‘존엄’이란 존재할 있나? 저자는 ‘좋은 죽음’이란 무엇일까도 자문한다. 저자가 기존의 죽음을 다룬 사람들과 다른 점은 아마도 임종을 맞이하는 환자들의 관점에서 ‘죽음’을 고려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일 듯하다. 따라서 저자에 따르면 일반적인 인지과정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임종환자의 ‘존엄’은 보다 다른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시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저자는 책의 여러 곳에서 꾸준히 ‘존엄’의 의미에 대해 묻는다. 저자는 심지어   다시 환기하자면 죽음이란 모든 인간에게 일어나는 실존 형식의 하나로서, 죽음을 17 관찰해온 저자의 ‘죽음’에 대한 경험을 나도 조금 얻어갈 있게 되어서 좋은 기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죽음의 의사라고 불리기도 하였던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연구와 업적은 저자의 선배 세대로서 죽음이란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해야하는지에 대해 영향을 미쳤다. 저자 모니카 렌츠는 선배 연구자 퀴블러 로스의 업적에 힘입은 크다는 점을 언급함과 동시에 한계점을 언급하고 있다. “퀴블러 로스는 죽음의 순간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설명하지 않고 다만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앗다는 확진을 받고 나서 쇼크, 상실, 비운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보여주는 내적인 여정만을 묘사한다.”(42) 퀴블러 로스의 견해는 임종 환자의 죽음에 대한 수용-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말하며, 저자 자신은 여기에서 나아가 죽음이라는 현상 자체 대한 이해를 하기위함을 분명히 하고 있다.

 

     저자 모니카 렌츠는 죽음의 과정은 크게 3가지 다른 양상으로 구분된다고 묘사한다. 그리고 임종 과정은 다른 상태 사이를 반복적으로 왔다 갔다 하는 전이 현상으로 이야기한다. 저자에 따르면 죽음의 과정 3단계는 삶과 죽음의 경계이전 단계(통과 이전), 경계를 통과하는 순간, 그리고 경계의 통과 이후 이루어진다고 본다. 경계 이전의 단계에서는 개별적 존재로서의 우리의 자아가 소멸되어간다고 한다. 경계 통과 이전의 경직된 상태는 경계를 통과하며 이러한 상태가 이완되는 과정을 수반한다고 한다. 또한 삶과 죽음의 경계를 기점으로 임종 환자의 공간에 대한 인식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게 됨을 강조한다. 따라서 임종환자의 인지 경험은 일반인들의 시각에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임종 환자는 죽어가는 과정을 통해 이전의 자기와 전혀 다른 타자가 되어 죽는다 한다. 죽음의 과정은 통제가 불가능하고 지극히 개인적이므로 결코 완전한 이해에 다다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불의의 사고와 같은 갑작스러운 죽음이 아닌 이상, 자연적인 죽음에는 틀로서의 진행방식은 존재하는 같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의 일부만이 죽음의 과정을 지켜보는 우리들이 파악될 것이다.

 

     모니카는 죽음의 단계에 대한 연구와 소개에서 멈추지 않고, 의미에 대해서도 추구한다. 죽음의 단계에서 존엄이란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임종환자의 가족으로서 그리고 전문가인 의사로서 환자를 어떻게 돌보아야하는지를 저자는 되묻고 고민한다. 모니카가 잊지 않고 당부하는 점은 임종 과정이 환자 뿐만 아니라 환자의 가족 모두가 함께하는 과정이라는 점이다. 한가지 주목하게 되는 부분은 존엄이라고 하는 개념이 초기 근대의 계몽주의적인 산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현대인들이 죽음으로부터 소외된 이후, 우리는 전문가'로서 의사의 서비스에 의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필요 전문가인 의사와 간호사에게 위탁함으로써, 과거 우리 선조들이 자신들의 집에서 임종과정을 지켜보고, 후손들에게 이야기와 경험을 통해서 전달되던 죽음 대한 지식과 이해가 일반인들로부터 분리된 상황을 초래했다. 결국, 일종의 계몽주의적 산물로서 죽음  전문가들의 지식과 돌봄에 대한 경험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따라서 나는 우리 선조들 보다 앞에서 언급한 존엄 의미가 더욱 가벼워진 시대를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결론)

     저자는 분명히 삶과 죽음의 경계 통과 이후의 모습에 대해 우리가 없다라고 선을 긋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죽음 연구에 있어서의 한계를 인정한다. 죽음의 실체에 대해 완전히 이해가 가진 않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지만, 모두에게 반드시일어나게될 실존의 형식으로서 죽음 대해 우리는, 그리고 나는 얼마나 모르는 것이 많은지 깨닫는 경험이었다. 죽음에 대해 좀더 알게 것이 반갑고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곳곳에서 저자가 기독교적 해석을 가미한 점에는 쉽게 수긍이 가지 않는 점은 있지만, ‘죽음 실체를 이해하기위한 노력과 죽음의 단계에서 진지하게 되묻는 존엄 의미 추구는 공감을 많이 하게 된다. 오히려 저자가 소개하는 칸트의 존엄 의미는 우리의 경험과 무관하게 인간이기에 존엄을 갖는다 정언적 선언이기에 모호하고 공감을 하기 힘든 점이 있다.

 

     현대 사회는 죽음을 금기시하는 사회라고 서경식 교수가 글을 언젠가 읽은 기억이 난다. 현대인들은 자신이 살던 집에서 가족들에 의해 둘러싸여 죽음을 맞는 것이 아니라 병원 시설에서 첨단 장비에 연결되어 생명 활동의 신호가 수치로 모니터링 되는 상태로 명을 이어가다 죽음을 맞이한다. 자신이 살던 곳에서 맞는 죽음은 금기시 된다. 모니카 렌츠는 오늘날 터부시되는 것은 이상 죽음 아닌, ‘죽음의 고통이라고 보다 명확히 지적하기도 한다. 현대인들이 이렇게 죽음을 회피하게 현상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죽음으로부터 점점 소외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를 좀더 신랄하게 비판해본다면, 나는 현대인들이 자신들의 죽음 아웃소싱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표현해보겠다.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삶의 일부를 회피하는 데서 생기는 소외현상이 아니고 무엇인가. 바꾸어 말하면, 이런 상황은 죽음 우리 삶의 필요충분조건이자 우리 삶의 일부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정보 내지는 조건처럼 인지의 대상으로 전락해버린데 원인이 있지 않을까한다. 가운데는 현대 사회의 병폐에 기인하는 점도 부인하지는 못할 것같다.      

 

     책을 덮으며 모니카 렌츠가 자문한 것처럼 좋은 죽음이란 무엇인가 고민해본다. 누구나 죽는다는 점은 사실이지만, 죽음은 너무나 개별적이기에 죽음 앞에 좋은이란 수식어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죽음으로부터 소외되고 있는 현대인으로서, 우리는 우리의 선배 세대에 비해 죽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음을 느낀다. 따라서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기회는 점점 희귀해진다. 죽음은 생명을 가진 개체의 삶의 완성이기에 죽음 대해 알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보다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향하게 있지 않을까.



(37면) 죽음의 이해
"자아 중심적 존재에서 더 큰 존재(포괄적 존재)로의 전이, 자존적 존재에서 포괄적 존재로의 전이는 죽음에서 가장 본질적으로 경험하는 영혼적, 정신적 과정이다."

(50면) ‘존엄‘에 대해
"존엄은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과의 올바른 관계를 지칭하는 용어다. 동시에 자율의 표현이자 (거부가 아닌) 긍정의 표현이며 본질에 다가서려는 ‘불굴의 의지‘다."

(89면) ‘임종환자에 대한 위로‘
"위로란 근본적으로 전혀 다른 존재에게 말을 거는 일이다."

(109)면 ‘죽음‘의 존재론적 해석
"존재론적으로 말하자면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이자 ‘대상을 경험하는‘ 통로에서 죽음이 발생한다. (...) 즉 인간은 존재자이면서도 이전의 자기와 전혀 다른 타자가 되어 죽는다."

(159면) 오늘날 왜곡된 죽음
"오늘날 터부시되는 것은 더 이상 죽음이 아닌, 죽음의 고통이다. 사람들은 고통과 함게 환자의 외모가 심하게 일그러진다는 사실에 두려워하고 공포를 느낀다. 이 공포에 불안해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187면) 임종준비
"임종 준비란 임종 환자뿐만 아니라 그들 가족 모두가 함께하는 과정이다."

(243면) 저자의 마지막 언급
"죽어가는 사람들의 증언과 이들의 마지막 변화가 내세에 대한 암시인지, 아니면 단지 임사체험을 표현한 것인지에 대한 대답은 여전히 열려 있다. 단지 해석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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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 - 아름다운 삶을 위한 철학의 기술
빌헬름 슈미트 지음, 장영태 옮김 / 책세상 / 2017년 2월
평점 :
절판



<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

빌헬름 슈미트 지음  |  장영태 옮김  |  [책세상]




(소풍 - 철학으로의 초대)

'남녀 두 사람이 같은 한 침대에서 서로 등을 지고 반대 방향으로 어긋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남자는 손에서 책을 놓고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듯하다.' 이 책 <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의 저자 빌헬름 슈미트는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철학으로의 소풍]을 화두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림 속에 포착된 어느 한 순간의 실존적 고독이 고스란히 부각되어 있는 듯하다. 슈미트는 소외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소외는 근본적이며, 속일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럽다.”(25면) 이 그림은 호퍼의 다른 작품처럼 정적과 부조리할 정도로 느껴지는 햇빛과 고독으로 가득한 한 삶의 에피소드를 표현해내는 듯하다. 어쩌면 그림 속의 남자가 손에서 책을 놓고 생각에 잠겨있는 순간이야 말로 비로소 ‘철학으로의 소풍’이 가능한 순간이 아닐까. 


왜 호퍼는 [철학으로의 소풍(Excursion into philosophy)]라는 제목을 이 그림에 붙였을까. 소풍은 우리의 흔한 일상은 아니지만 우리 삶에 친숙한 요소이다. 나아가 익숙한 일상을 벗어난 여행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소풍은 ‘매우 짧은 여행’으로 생각해볼 수 있겠다. 우리가 사는 ‘다른’ 현대 속의 바쁜 스케줄(삶이 아닌) 속에서 익숙하지 않은 구조를 잠시 벗어나 ‘나’를 찾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음을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다시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 본다. 호퍼가 ‘사실주의 화가’라고도 불린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의 그림이 마음에 드는 것은 그림의 인물과 배경이 어우러져 내뿜는 정적, 고요함의 정서가 인상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묘하게도 그림은 너무나 ‘사진적’이란 느낌을 주고있다. 사진에는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배경의 사물이 담긴다. 사진 작가는 자신이 보는 대상의 어느 한 프레임만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부만 보이는 액자, 일부만 보이는 창문, 조각나있는 햇빛. 이렇게 호퍼는 실존적 삶의 한 순간을 담았다. 이 순간을 저자 슈미트는 다음과 같이 첨언한다. “이 정지의 순간이, 철학과 성찰의 순간으로서의 정지가 본보기로 포착되어 있다.”(22면)

이 정지의 순간은 슈미트가 호퍼의 그림에서 지적한 ‘의미없는 햇빛’이 충만한 공간과 이를 가득 채운 시간을 의미하는 것 같다. 따라서 이 ‘무의미한’ 햇빛은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이 ‘정지한 순간’의 중요성은 슈미트 역시 사소한 것이 아닌 오히려 매우 소중한 시간임을 재인식하고 있다. “빈 시간은 자신의 일관성을 회복하고, 새롭게 형상화할 수 있는 자기의 시간인 것이다.”(124면)


결국 호퍼의 그림에서 그림 속 남자가 책을 내려놓고 생각에 잠긴 이 순간은 그림 속 다른 한 곳에서 무심히 보이는 창 밖의 풍경처럼 자신을 밖에서 바라보게하는 시간으로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슈미트는 이 ‘빈 시간’을 통해서 비로소 주체는 ‘시간을 소유’하기에 이르며 “자기 자신 및 다른 사람들을 위한 그리고 다른 일들을 위한 시간을 갖게 된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슈미트는 ‘시간을 소유한다는 것’을 ‘편안하게 살아온 실존의 형식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것이 곧 ‘나 자신으로부터 거리두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다른 한편, ‘시간 소유하기’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모든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마치 우리가 <어린 왕자>중에서, 여우와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대목을 흔히 떠올리듯 ‘서로에게 길들여지는 것’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이는 저자가 ‘익명성과 보편성을 떨쳐’버리고, ‘특수성’을 갖게 됨을 의미할 것이다. 이름을 지어주고, 이름으로 서로를 불러주는 것이 곧 ‘나의 시간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삶의 기술로서의 철학 - 아름다운 삶을 위한 소품)

책을 다 읽고 호퍼의 [철학으로의 소풍]을 다시 살펴보니 저자는 독자들을 ‘삶의 기술’로서의 철학하는 시간으로 초대하기 위해 이 그림을 제시한 것 같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삶의 기술’로서의 철학은 탁상공론과 같은 ‘철학을 위한 철학’이 아니라, 삶에 활용될 수 있는 ‘도구’로서의 기능성을 염두해둔 듯하다. 이 책에는 ‘쾌락누리기’, ‘쾌활함’, ‘분노’, ‘반어와 멜랑콜리’와 같은 다양한 주제로의 ‘짧은 여행’을 의도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생각되는 점은 저자 빌헬름 슈미트가 책 전반에 걸쳐 ‘주체적으로 아름다운 삶을 살기 위한 소품으로서의 철학하기’를 줄곧 말하려는 듯하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나를 낯설게 바라보기’가 아닐까.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나 자신으로부터 거리 두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에드워드 호퍼의 [철학으로의 소풍]일 것이다. 


빌헬름 슈미트는 성찰적, 철학적 ‘삶의 기술’을 이야기하기 위해 세네카, 아리스토넬레스, 데모크리토스와 같은 고대 철학자 뿐만 아니라 몽테뉴, 니체, 키르케고르, 쇼펜하우어, 하이데거, 아도르노, 빅토르 프랭클, 미셸 푸코와 같은 익숙한 이름의 철학자, 사상가를 소환한다. 책을 읽는 도중에 받은 느낌은 어쩌면 이 책은 몽테뉴의 <수상록>과 재독철학자 한병철 교수의 저작들 사이의 어느 한 지점 즈음인 인상을 준다는 점이었다. 흥미롭게도 역자 후기에서 책의 역자도 역시 한병철 교수를 언급하고 있다. 아마도 ‘무한 긍정의 성과 사회’나 근대를 ‘부정성의 제거’와 연관지어 설명하고, ‘부정성의 긍정’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한병철교수의 스타일을 떠올리게 하는 점이 있다. 반면 에세(essai)라는 자기 탐색적이고 성찰적인 글쓰기 장르를 처음 시도했던 몽테뉴 처럼 저자 자신의 개인적 성찰을 담고 있지는 않으나 주제의 선정 및 책의 구조가 몽테뉴의 <수상록>을 떠올리게 하는 특징은 분명히 존재한다. 아울러 ‘성찰적 삶의 기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만큼, 몽테뉴의 글쓰기 방식은 은연중에 이 책의 저술과정에도 분명 영향을 준 요소라고 볼 수 있을것이다. 




(가상공간에 대한 사유의 확장)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슈미트는 과거의 철학자, 사상가들을 소환하여 삶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들에 대해 성찰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더 나아가 과거의 철학자들이 다루어 본적없는 ‘가상공간’을 이야기 하기도 한다. 한병철의 저작에서 ‘정보’와 ‘지식’의 구별짓기를 시도하며 그 특징을 설명하듯, 슈미트도 ‘정보’와 ‘주체적 지혜의 필요성’을 언급하고 있다. 슈미트는 ‘정보’를 ‘일상의 사물을 밀어내버리는 기형적인 물건들’이라는 빌렘 플루서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이 ‘기형적인 물건들’인 정보가 떠다니는 무한한 가상공간의 현실을 긍정할만한 점이 있다면 이는 ‘탈중심적 정보 전달 공간’으로서의 기능일 것이다. ‘정보의 바다’로서 긍정적으로 평가해본다면, 우리는 무한에 가까운 정보를 담고있는 이 공간을 하나의 사전, 나아가 도서관으로서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지구 반대편에서 만들어지는 물건을 가상공간에 마련된 상거래 플랫폼을 통해 구입하거나 조달할 수 있다는 장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이 정보를 ‘어떻게 얻고, 정보의 중요도의 순위를 결정하는 일’이 중요해진다는 점을 슈미트는 지적하고 있다. 곧 우리의 삶이 충만해지도록 이러한 행위를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보의 ‘관리’는 여전히 주체의 몫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가상공간에서 정보의 사용 주체로서 우리에게는 의무가 주어지는데 그것은 “정보와 통신이 한도를 넘어설 때 그 양을 줄이고 성찰의 공간을 다시 획득하는 것이 삶의 수행에서 의무가 된다.”(224면)라는 점이다. 우리가 정보를 관리하는 주체로서 의무를 다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주체성을 상실하게 될 것을 슈미트는 다시금 경고한다. “타자에게 자신을 맡기지 않으려면 자신의 고유한 정보능력을 획득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면 ‘정보 엘리트’에게 자신을 내 맡기는 길밖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229면)라는 것이다. 곧 우리가 정보의 ‘수문지기’가 되라는 주문일텐데, 이 주장은 ‘정보’에 관해 의심을 갖고, 근거를 찾아내며, 독자적으로 판단하라고 말하던 언어학자 촘스키의 입장과도 일치한다. 정보로 넘쳐나는 가상공간을 만약 몽테뉴가 21세기를 살면서 목격하고 체험해 보게 된다면, 아마도 ‘삶의 주체’로서 이와 같은 입장을 표명했을 것같다. 




(죽음을 부정하는 시대-우리는?)

언젠간 다가올 ‘죽음’에 대해 독특한 견해를 피력한 몽테뉴의 <수상록> ‘죽음에 대하여’를 보면,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 정온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면 만족한다는 몽테뉴의 독특한 관점을 엿볼 수 있다. 시대마다, 지역마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엄연한 자연의 질서인 반면, ‘죽음’에 대한 관점 및 태도에는 큰 차이가 있다. 특히나 현대는 ‘죽음’이 거부당하는 시기라고 서경식 교수는 지적하고 있지 않은가. 나의 조부/조모만 해도 모두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셨지만, 이제는 대부분의 사람이 죽음을 맞이하는 공간이 병원/요양원이 되어 버렸다. 가정에서 ‘죽음’은 금기시되어 버렸고, 거부당하는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슈미트는 “삶의 기술에서 중요한 것은 삶의 한계에 대한 인식이지 죽음에 이르는 존재가 아니다.”(43면)라고 강변한다. 곧 타인의 죽음은 곧 나의 유한성 내지는 한계를 자각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이해된다. 앞서 슈미트가 제시했던 에드워드 호퍼의 [철학의로의 소풍]도 역시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본다면 ‘삶의 한계’에 대한 인식의 순간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이유는 슈미트가 “철학을 한다는 것은 이러한 한계의식 안에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44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기도하다.


아울러 슈미트는 죽음의 순간을 다음과 같이 ‘낯설게 이야기하기’를 시도한다. “죽음은 솔직함의 극단적 지점이며, 더 이상 회피를 용납하지 않는 진리의 순간이다.”(109면) 곧 죽음이란 하나의 작품으로서의 개인의 삶이 ‘완성’되는 시점일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죽는다. 우리는 모두 생명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슈미트는 우리가 죽음의 면전에서 제기되는 마지막 질문을 상상한다. “그것(나의 삶)은 아름다운 삶, 충만한 실존이었나?”(109면)라고 말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20여 년 전 나의 학창 시절에 읽어본 천상병 시인의 시 [귀천]의 마지막 연을 떠올려본다.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시인의 시에서 나는 ‘죽음’에 대한 염려, 두려움, 또는 부정성을 발견할 수 없다. 자신의 ‘짧았던 인생’을 ‘소풍’으로 보았던 시인은 바로 자신에게 ‘아름다운 삶’을 살았노라 말하길 희망하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의 한 장인 ‘죽음을 동반하는 삶에 대하여’에 표현한 슈미트의 의도는 천상병 시인의 이 싯구에 모두 담겨있다고 본다. 



(오늘의 소풍을 끝내며)

이 책은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 하룻밤에 읽어내는 책이라기보다 독자의 일상에서 독자의 눈에 띄는 주제 하나를 읽어보고, 다시 책을 내려 놓은 다음 성찰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한 문장, 한 문장 긴 호흡으로 텍스트를 따라가며 음미해보면, 급한 마음에 빨리 읽을 때 전혀 다가오지 않았던 문장들이 어느 순간 일어나서 나에게 다가오기도 했다. 이 책이 한병철 교수의 저작들과 다르게 느껴지는 점 또 하나는 이 책이 한병철 교수의 책보다 조금 더 ‘추상적’(혹은 막연함)이라는 느낌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슈미트는 독자와의 적절한 ‘거리두기’를 의도함으로써 ‘독자 나름의 소풍’으로 초대하고 싶었을 수도 있겠고, 혹은 우리 각자의 보다 긴 삶이 이러한 ‘짧은 여행’인 소풍들을 통해 더욱 아름답게 가꾸어 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나도 오늘의 ‘소풍’을 마무리하고, 다음 ‘소풍’을 새롭게 기대해본다. 






(이 리뷰는 책세상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소외는 근본적이며, 속일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럽다." (25면)

"삶의 기술에서 중요한 것은 삶의 한계에 대한 인식이지 ‘죽음에 이르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43면)

"철학을 한다는 것은 이런 한계의식 안에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44면)

(쾌락에 대해)
"쾌락은 자신을 넘어서도록 촉진하고, 일관성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뒤집어 해체하고 새롭게 조립한다."(70면)

"쾌락의 활용도 에로티시즘 안에 깃들어야 참된 향유를 낳는다."(76면)

"정신, 영혼, 육체를 포괄하는 에로틱한 만남이 이상적이다."(77면)

(죽음에 대하여)
*죽음의 면전에서 마지막으로 제기되는 물음 - "그것(나의 삶)은 아름다운 삶, 충만한 실존이었나? "(109면)

"우리는 근대가 고통을 추방했을 뿐만 아니라 죽음조차 망각했다는 이야기를, 다시 말해 근대적 삶으로부터 제외되었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99면)

(시간 사용하기에 대해)

"빈 시간은 자신의 일관성을 회복하고, 새롭게 형상화할 수 있는 자기의 시간인 것이다."(124면)

"빈 시간은 현재의 어려움과 거리를 두게 하고, 그 어려움을 밖에서 바라보게 하며, 미래적인 것의 넓이를 시야에 떠오르게 한다."(124면)

(시도하며 살아가기)

"살면서 의심이 생기면 자기 자신과 자신의 가능성들을 시도해보는 것이 중요하다."(127면)

"상상은 다르게 사유하고, 다르게 사는 시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133면)

(멜랑콜리, 성장의 고통)

"삶의 기술의 주체에게 멜랑콜리의 의미는 ‘골똘히 생각함‘이다. 골똘히 생각함으로써 자신에게 성찰적 거리를 취하고 스스로에게 낯설어지고, ‘정체성‘으로 생각했던 것의 붕괴를 경험하고, 습관적으로 살면서 삶을 그냥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는 자명함을 벗어던지게 되는 것이다."(185면)

(가상공간에 대해)

"가상공간은 ‘탈중심적 정보전달의 공간‘이다."(223면)

"과학기술의 전체성 요구에서 벗어나고 삶의 형성의 다른 가능성에 개방된 자세를 취하기 위해서는 삼가는 태도, 회의적인 거리 두기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228면)

"타자에게 자신을 맡기지 않으려면 자신의 고유한 정보능력을 획득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면 ‘정보엘리트‘에게 자신을 내맡기는 길밖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229면)

(쾌활함에 대하여)

"쾌활함은 평정의 태도이다."(252면)

"쾌활함은 기쁨이 아니라 충만한 삶의 표현이라는 점이다."(255면)

"쾌활함이 멜랑콜리와 멀지 않다."(258면)
"쾌활함은 유한성으로의 갇힘이 아니며, 오히려 무한 차원을 향한 개방이다."

"쾌활함은 후회없는 삶을 이끄는 것을 말한다."(259면)
"쾌활함은 아름다움의 실현과 함께 커진다."

"삶이 힘들어지는 바로 그 때, 밑바탕에 놓여 있는 비극성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뛰어난 진통제로서의 쾌활함이 생성된다."(264면)
"쾌활함은 조롱과 무관하나, 반어와는 관계를 맺고 있다."(266면)

(삶의 기술의 목적)

"성찰적 삶의 기술은 개인이 자신의 힘을 작동시키고 이를 통해 자유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을 때에만 비로소 펼쳐질 수 있다."(287면)

"긍정할만한 가치가 있는 삶은 ‘참된 삶‘이다."(295면)

"삶의 기술은 열거된 관점들을 배경으로 스스로에게 아름다운 삶을 만드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29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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찢어진 예금통장 - 고백 그리고 고발 다음 이야기
안천식 지음 / 옹두리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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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찢어진 예금통장>

안천식 지음 | 도서출판 옹두리

 

대한민국의 독립적인 사법체계는 유용한 허구였나?

그래도 법원과 법관이 제일 공정하다.” 아마도 말은 자랑스러운검사 자녀를 부모들의 자위일것이다.

   안천식 변호사의 번째 <고백 그리고 고발>(이하 <고발>) 번째 <찢어진 예금통장>(이하 <예금통장>) 나왔다. <고발> 읽으면서 저자가 10 동안 18 이상의 재판에서 패소한 과정이 과연 H건설이 하급법원에서 대법원까지 법관을 매수했던 것일까 아니면 제출서류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판결문을 작성하는 것이 관행이었을까 궁금했었다. <예금통장>에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나의 궁금증은 후자였던 모양이다. 60명에 이르는 법관이 일괄적으로 매수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보다 자연스러운 판단은 엄청난 양의 자료를 준비하여 제출한 순진한 변호사 간절함과 노력은 법원의 관행 앞에, 법관들의 무책임한 관행 앞에서 무용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저자는 번째 책에서 이러한 법원의 관행이야말로 반헌법적이라고 다시 고발하고 있다.

 

   1945 8, 우리가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은 직후, 일제에 부역하던 한국인 법관 경찰들은 모두 종적을 감추었다가, 김구 선생과 이승만이 귀국할 즈음인 10-11 미군사정권은 다시 이들 친일 법관 경찰들을 다시 불러들여 중용하였다. 이는 대한민국이 친일파 청산에 실패한 가장 이유이며, 이후 국내에서 벌어진 모든 대학살의 시작을 알리는 씨앗이 사건이라고 본다. 해방이후 대한민국 지식인의 지층은 또다시 친일지식인이 근간을 이루는 구도로 재편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들만의 세력을 구축하는 일이 병행되었던 . 다시말하면 능력있고, 올바른 뜻을 갖고 있던 법관 경찰들을 또다시 솎아내어 배제시키는 구조를 만들었던 것이다. 나는 안타까운 대한민국 현대사의 장면이 현재 우리가 영향을 받고 있는 박정희-박근혜 정권이 지속할 수밖에 없는 이유임을 새삼 안타까워하며 바라본다. 다시 비판해보자면 <예금통장>에서 보이는 법원의 반헌법적 관행은 이러한 사회적 토양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 저자가 대한민국의 사법체계에 대해 지적하고 있는 문제의식은 '법관이 갖는 절대적 권한'과 관련이 있다.

 

 

삼권분립의 헌법정신은, 적어도 우리 사법체계에 이르러서는 법관에 대한 절대적 믿음 강요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169)

신분을 보장받는 법관이 재판에 대한 모든 권력을 독점하는 사법구조는, 사법권의 남용이 가장 쉬운 구조이기도 하다.”(174)

이렇듯 법리적용에 대한 법관의 권한은 사실확정에 대한 권한과 결합하면 무지막지한 가상의 현실까지 만들어낼 있는 것이 우리의 사법 시스템인 것이다.”(185)

우리 헌법이 법관에게 재판에 대한 모든 권한을 독점시키는 구조는 법관과 법원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강요하는 구조라는 의미이다.”(186)

 

 

   이러한 절대권력을 가진 법원 사법시스템이 국민의 기본권을 절대적으로 지켜주지 못하고, 오히려 침해하는 결과를 낳는다면 이를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누가 이일을 해낼 것인가?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것인지 판단하고 실행에 옮겨야할 것인가? 명의 변호사로서 사법현실을 바궈보고자 본인이 직접 출판사를 차려 책을 2차례 출간하는 현실을 과연 무엇이라 말할 있을까? <고발> <예금통장>에서 기술하는 재판은 일제강점기에 등장하는 사건이 아니라 바로 작년(2016)까지만 해도 지속되던 사건이었다.

 

   사법부가 권력자가 되어 국민의 위에 올라 군림하게 되면 국민은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 상태 돌입하게 것이라 저자는 진단한다. 이러한 사회 구조에서 구성원의 삶의 조건이 자력갱생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결국 법을 알고 이를 다룰 아는 집단만을 위한 사법시스템이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사법시스템의 서비스를 구매할 있는 유전(有錢) 고객만이 살아남게 것이다. 생물학에서 이야기하던 적자생존 진화 원리가 이들 유전고객에게 정당화되어 적용될 것인지 씁쓸하기만 하다. 

 

 

(법관의 권력 분산을 위해 배심원 제도의 고려)

   저자는 국민 개인의 기본권 침해를 방지하려면 재판권의 남용을 막고 이를 견제해야한다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배심제도와 참심제도 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법관의 권한을 제한하고 분점하는 제도로서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고 언급했다. 저자는 책에 나온 사건을 배심제도로 심리했을 경우 99.99% 반대의 결과가 나왔을 것이라 확신한다. 분별있는 일반 시민들로 구성된 배심원들이 사건의 취지나 상황에 대해 보다 면밀히 파악하고 재판의 판결에 영향을 미치는 역할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 인간이 만든 제도 중에 완벽한 것이 있었던가. 미국의 배심원제를 비롯한 사법체계이 몽테스키외의 삼권분립이론 가장 이상적으로 실현하고 있는 제도로 평가받는다고 저자는 소개하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유전무죄, 무전유죄 현실을 미국 사법재판의 실례를 통해 접하고 있다.

 

   이미 100 전에 문학작품에서도 배심원제도의 문제점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톨스토이의 <부활>에서 주인공 네흘류도프는 자신이 인생을 망쳐놓았던 젊은 여인 카튜샤 살인사건 재판에 배심원으로서 참여하게 된다. 하지만 돈이 없던 카튜사 살인죄라는 누명을 쓰게 위기에 처해진다. 만약 특정 배심원이 배심원단의 여론을 조종하게되는 결과를 초래하게된다면? 혹은 배심원 들이 H건설과 같은 대기업으로부터 신변의 위협을 받게 된다면? 대한민국의 사법체계는 배심원들의 신변과 안전을 책임지고 보장할 있을까? 현재 인권이라는 명목으로 성폭행 가해자의 편의를 돌보아주는 반면 피해자의 정신적 안정과 치료, 신변안전이라는 문제에 그대로 노출되어있는 피해자들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하는 현실에서, 수많은 사건의 배심원들의 신변 안전 독립성을 사법체계가 지켜낼 있을지 의문이다.    

 

 

(거대 관료주의의 범죄성)

   또다시 <부활>에서 톨스토이가 고발하고 있는 관료주의의 범죄성을 떠올려본다. 무더운 여름 머나면 시베리아로 죄수 호송을 맡은 관료들의 무리하고 비인간적인 일처리에 죄수들은 쓰러지고 죽어간다. 그리고 관료들은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으며 개선의 여지도 보이지 않는다. <고발> <예금통장> 보이는 관료주의적인 사법체계와 다르지 않다. 대기업이 관여한 부동산 매매 사기 사건과 관련하여 법원에서, 법관이 어느 누구든 변호사가 준비한 문건의 대의라도 제대로 파악하고 조치를 취했더라면, 10 년의 세월 동안 사람이 자살하고, 저자에게 기대고 있는 의뢰인의 재산권이 침해를 받는 일이 일어날 있었을까? 과연 대한민국 사법체계의 관료주의적인 구조가 이들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일까? 아무런 생각없이 규정대로자신의 일을 아이히만과도 다르지 않다. 한나 아렌트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에서 아이히만은 히틀러의 수하에 있으면서 히틀러의 지시를 착실히 수행한 착한 공무원으로서, 인류사에 없는 대학살을 저지른 주요 인물이 있었던이다. <고발> <예금통장> 관여한 60 여명의 대한민국 엘리트 법관들은 아이히만과 뭐가 다른가? 피해자들을 직접 가스실로 보내지 않지 않았다고? 대한민국 법관들은 법의 존재이유를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법은 인간 존엄을 지켜주는 보루이다. 대한민국의 사법체계는 무지한 인간들 위에 완벽한 법체계가 있다 믿음에 근거하고 있는 같다. ‘법대로라는 말처럼 과연 세상 만물의 문제를 해결할 있는 기준칙 내지는 법칙이 있는가라는 물음이 앞선다. 대한민국의 사법체계에서 법관은 사실상 이다. ‘ 말이 이라는 말이 21세기에도 진실로 통하기 때문이다. 톨스토이가 비판한 거대 관료주의의 문제에서 나아가 관료들이 무한한 권력을 가질 , 지금 어디에선가  혹은 앞으로 이와 비슷한 일들이 계속 생겨나게 것이다. 결국 관료주의화된 사법권력이 다른 정치 세력이나 대기업에 유리한 결정을 내리게 되면(이미 삼성을 비롯한 대한민국 대기업의 오너들은 이재용의 영장기각으로 안도하고 있을터이다), 결국 영향은 대한민국 시민 모두에게 미치게 것이다. 박정희 정권의 근간이 되었던 유신헌법작성에 참여했던 김기춘은 여전히 살아서 40 넘게 처벌하지도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 사회는 독재자의 딸을 또다시 대통령으로 뽑고, ‘기억상실증 걸린 김기춘을 또다시 소환하였다. 우리는 대가를 아직도 치르고 있는 중이다.

 

 

(양승태 대법원장의 사과)

15 양승태 대법원장은 2016 9 6 대국민 사과문을 낭독했다고 한다(214). 낭독문 일부가 책에 담겨있다. 사건의 발단은 지방법원의 현직 부장판사가 화장품회사의 대표로부터 금품을 수수하고 재판에서 편의를 봐주었던 사실이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한홍구 교수의 저서 <사법부> 보면 대한민국 사법부의 현대사가 담겨있는데, 국내 최고의 엘리트 그룹이 어떻게 독재정권 하에서 권력의 시녀가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시녀 그룹의 수장은 또다시 어떻게 소신있는 판사와 변호사를 소외시키고 배제시켜 자신들만의 왕국 구축해왔는지 기록하고 있다. 검사, 변호사들도 모두 결국은 대한민국의 사람, 시민일 뿐인데 이들에게 우리는 지사(志士)인간이라는 키치 우리 스스로 내건 것은 아닌가. 양승태 대법원장의 대국민 사과문을 통해 법관들도 물신화 첨단을 나아가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독립적일 없는 인간일 뿐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다만 부장판사 출신의 변호사가 판사에게 뇌물을 회사의 대표에게 접근, 일이 해결되었으니 수고비를 내놓으라고 금품을 요구한 것은 나의 빈곤한 상상력을 훨씬 뛰어넘는 경악 자체였다. 내가 경제적으로 여유롭게 살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도 우수한 사피엔스 특징인 사회적 상상력 부족하기 때문일까하는 자괴감마저 정도다.

 

 

(세계은행이 발표한 자료)

   민사분야의 법적 분쟁해결에서 세계1위의 평가를 받았다.’(229)

   저자가 제시한 평가과정을 보니, 각국 로펌변호사 등의 법률 전문가들이 제공한 자료에 기반한다고 하였다. 평가과정이 결국 <찢어진 예금통장>에서 H건설이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는 인물들을 증인으로 내세워 승소한 것과 다르지 않을 같단 생각이 든다. 대한민국의 사법체계를 , 전직 부장판사 출신의 대형 로펌 변호사가 기업의 이익을 대변하여 어떠한 방식으로든승소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기업의 이익에 기여했다고 해도 결국 세계은행이 판단하는 자료는 문제해결 건수라는 데이터를 가지고 판단할 것이 아닌가. 아마 책에서 등장한 H건설이 승소한 사건도 자랑스럽게 세계은행이 발표한 자료에 대한민국의 민사분야 법적 분쟁 해결에 세계1위를 하도록 기여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세계은행이 발표한 평가야말로 유용한 허구라고 생각한다. 대형 로펌 변호사들이 이러한 실적을 배경에는 대한민국 사법권의 관료주의적 구조를 활용한 결과일 있다. 법관의 무제한의 권력은 앞서 언급한 양승태 대법원장의 대국민 사과문과 관련한 사건에서도 보듯, 현직 부장 판사에 대한 뇌물 액수만 올려놓을 있는 부조리한 구조를 잉태하고 있다.  

 

전문가들의 직업윤리 타락은 사회를 돌이킬 없는 지경으로 몰아가게 된다.”(231)

나는 이쯤에서 미국 어느 청소년이 집단따돌림으로 자살한 사건에 대해 자신의 이야기를 하던 어느 미국인 학생의 말을 떠올린다. 학생은 다음과 같은 취지로 말했다. “여러분이 어떤 문제의 해결에 참여하지 않거나 침묵한다면, 여러분은 그들(집단따돌림을 사람들, 문제의 근원) 하나일 뿐이다.”

 

 

 

 

(알베르 카뮈의 )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 그것은 내일의 범죄에게 용기를 주는 것과 똑같이 어리석은 짓이다.”

 

위의 미국 청소년이 말이나 카뮈의 말이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경험한 부조리 망각하지 않는 것이다. 김기춘처럼 온갖 추악한 일을 저지른 편리하게도 치매에 걸려 자신이 저지른 일을 기억도 하지 못하는 상황을 겪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를 고민해야한다.

 

 

 

(편집 구성에서 아쉬웠던 )

: 글의 작은 꼭지 끝날 등장하는옹두리 혜윰 존재가 눈에 띈다. 다음 글로 넘어가기 분위기를 전환하고 여백을 두어 숨을 돌릴 기회를 준다고 수도 있겠다. 답답하고 무거운 일련의 현상, 사건을 따라가노라면 분명 역할을 할지도 모르겠다. 반면 내게는 중간 중간에 등장하여 흐름을 끊고 산만하게 만드는 인상을 받았다. ‘옹두리 혜윰 넣을 필요가 있었을까? 오히려 자기계발서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다. 저자의 의도를 강조하고 싶어서였을까. 개인적으로 옹두리 혜윰 흐름을 끊는 역할을 하기에 산만하게 만드는 같아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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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만들어진 성 - 뇌과학이 만든 섹시즘에 관한 환상과 거짓말
코델리아 파인 지음, 이지윤 옮김 / 휴머니스트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만들어진 사회, 그리고 인간의 가소성

                                    - <젠더, 만들어진 > 읽고

 

안에 선명히 각인되어 있는 기억으로부터 어릴적 경험

     어렸을 우리 집에는 피아노가 있었다. 누나는 초등학교 들어가기 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고, 우리 집에는 피아노 소리가 자주 들리게 되었다. 내가 6 즈음의 일이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누나가 피아노 학원을 다니면서 바쁜생활을 하는 동안 누나를 괴롭히며 빈둥거리던 나에게 부모님의 관심이 모아졌던 모양이다. 피아노 학원에 가보라는 어머니의 권유에 나는 발걸음이 무거웠는데,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내가 당시에 피아노는 여자들만 연주하는 악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빈둥거리는 남자아이라도 나의 생각에 피아노는 남자인 내가 연주해서는 안되는악기였던 것이다. 피아노 학원에 가서도 또래의 여자 아이들과 누나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곳에 있다는 사실을 수치스럽게 느꼈다. 도대체 어떤 연유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질문은 내가 오래도록 지닌 아마도 가장 오래된 궁금증이었으며 풀리지 않을 숙제였다. 그리고 당시 어린 내가 느꼈던 수치스러운 감정은 이후 30년이 훌쩍 지나도록 아직도 느낄 있을만큼 안에 분명히 각인되어있다.

 

     실험 심리학자 코델리아 파인의 저서 <젠더, 만들어진 (Delusions of Gender)> 읽으면서, 피아노 학원에서 자신을 부끄러워하던 어린 이해할 있는 실마리를 발견했다. 책에는 아이가 어머니의 뱃속에서 세상으로 나오면서 얼마나 많은 성구별적문화 코드로 둘러싸여 있는지를 깨닫게 해준다. 나아가 아이가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 아이의 성별을 알게된 부모가 아이에게 갖는 기대의 유형이 얼마나 다른지 보여주고 있다. ‘여아=분홍색’, ‘남아=파랑색 같은 전형이 이름표나 담요, 등부터 아이가 뱃속에서 움직이는 모습을 묘사하는 언어까지 노골적으로 유형화되어있음을 알게되었다. 일단 아이가 태어나면 성구별적환경의 무차별적인 세례를 받는다. 저자의 책을 읽어보면 우리가 성에 대해 상식처럼 알고 동의하게 되는 사항들 예컨대 남자와 여자의 대화법이 다르다는 일종의 모태신앙과도 같이 우리의 삶에 스며들어 있음을 있다. 나아가 저자는 대한 고정관념이 가장 강한 시기가 보통 5-6 때라는 점도 언급하고 있다. 이는 내가 6 즈음 피아노를 배우고 연주하는 일이 부끄러운 이라고 느꼈던 경험이 나만의 특수한 사건이 아님을 말해준다. 저자가 하나의 () 제목으로도 사용한 성평등은 집에서 시작된다 문구는 성구별적 세상에서 성평등에 대한 감수성을 기를 있는 곳은 바로 가정이라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만약 내가 어려서부터 보다 주의깊게 이러한 편견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피아노를 좋아하고 즐길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물론 사례는 피아노에 대한 호불호를 넘어 인간의 삶에 평생 영향을 있는 가치관의 문제에도 연결될 있다. 성인이 지금까지 내가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내린 수많은 결정들도 어쩌면 나를 둘러싸고 있던 이러한 성구별적환경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학습 견해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성차별 선진국으로서의 미국

     책에서 발견하게 사실 하나는 미국 사회가 얼마나 성차별적 문화를 만드는데 있어 선진국이었가 하는 점이다. 성차별과 관련한 편견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 남자는 수학 과학 이성적이고 분석적인 학문에 능한 반면, 여자는 상대방에 공감하는 일과 종합하는 일에 능하다 것이다. 이러한 성별 차이를 부각시키고 정형화하기위해서 미국내 최고의 지식인들이 여성의 열등한 특성 발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연구를 했던가를 깨닫게 되어 놀랍다. 미국이라는 사회는 백인 남성에 의해, 백인 남성을 위해 치밀하게 설계된 성차별 국가라는 인상을 받았다. 예를 들어 대학의 컴퓨터공학과에서 공부하는 여학생 비율을 국가별로 비교한 통계가 매우 흥미롭다. 저자가 제시한 통계자료를 보면, 3세계 국가에서 컴퓨터공학과의 여학생 비율은 50% 상회하는 반면, 유독 미국에서 15%수준에 불과했다. 사실은 미국사회에 형성되어 있는 성구별적사회심리 구조가 얼마나 포괄적으로 남녀의 심리와 행동에 영향을 주고 있는지에 대해 단서를 제공한다. 좀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19세기 하버드 의대 교수였던 에드워드 클라크는 여성의 열등한 특성을 의학전문가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여성의) 지적 노동은 난소에서 뇌까지 위험할 정도로 맹렬하게 에너지를 보내 생식력을 위험에 빠뜨리고, 의학적으로 심각한 다른 질병들을 야기한다.그러므로 여성이 열등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리학적인 지식을 동원하여 남성의 우월성을 드러내려는 노력은 그나마 유식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 지식인층에서 여성과 남성의 뇌크기 차이 가지고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했던 사실을 알게되면 더욱 경악하게 된다. 미국이라는 사회가 국내 최고의 지식인들(백인 남성들로 구성된 집단) 의해 남녀의 성차별적인 인식이 계획적이고 정교하게 형성된 사회임을 보여준다. 나아가 책은 인간이란 존재는 모순적으로 얼마나 쉽게 사회환경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있는지, 그리고 오랜 시간동안 형성된 행동을 바꾸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또한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현대에 들어서는 남녀 사이의 생물학적인 차이를 가지고 여성의 열등함을 주장하는 충격적인 사례들은 과학기술의 급격한 발전으로 사라진 반면, 자리를 신경과학의 뇌촬영 영상이 대신하게 되었다. fMRI(기능적 자기 공명 영상) PET(양전자 단층촬영)로부터재구성 뇌의 활동부위 스냅사진들은 여성과 남성의뇌기능의 차이 분명하게 보여주는데이용되고있다. 여기서 이용이라고 이유는 과학장비로 측정된 신경과학적 결과와 실제 남녀의 행동의 차이를 연결해주는 심리적 해석이 매우주관적이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측정 데이터를 해석하는 있어 수많은 가능성을 전문가들은 자신들의 관점에서 여과하고 선택하여 의미를추출하기 때문에 그렇다. 인간이란 복잡한 존재로부터 측정한 단순한 전기적인 신호를 다시 심리적 원인으로 환원하는 데에서 문제가 발생할 있다. 따라서 앞으로신경과학에서 보여주는 뇌활동의 남녀 차이를 제시하며그러므로 남녀가 다르게 행동한다라고 주장하는 연구가 있다면, 우리는 연구를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여성과 남성의 다른 선천적인 차이를 지지하는 사람으로서 하버드 대학 인지심리학자인 스티븐 핑커 있다. 핑커도 앞에서 19세기 여성의 신체적 열등함과 지적 열등함 언급했던 하버드대 교수 에드워드 클라크 견해와 크게 다를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스티븐 핑커 신경과학의 결과를 언급하며 좀더 고도화된 자료와 언어로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는 것만 다를 뿐이었다. 장비로부터 측정된 수치와 지표만으로 복잡한 인간의 심리를 해석하려는 우를 범하고 있다. 결국 미국이라는 사회에서 가치중립적이라고 여겨지는 과학의 연구결과가 이를 다루는 ‘(백인)남자 전문가 집단 의하여 어떻게 남녀 차이를 지지하는 견해를 공고히 해주고 있는지 살펴볼 있었다.       

 

 

     저자인 코델리아 파인은 책을 쓰게 동기를 책의 중간에서 다음과 같이 슬며시 내비친다.

뉴로섹시즘(신경과학이 만들어내는 성차별) 고정관념의 손상, 한계, 잠재적 자기 성취를 촉진한다. 3 나는 아들의 유치원 선생이 아들의 뇌가 감정과 언어를 연결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책을 읽는 발견했다. 그래서 나는 책을 쓰기로 결심했다.(254)

 

     책에서는 40 자신의 아이가 성차별적 문화에 노출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노력했던 심리학자 부부를 언급한다. 부모는 아이가 보는 책을 보고 성차별적인 신호가 보이면 지우거나 수정하고, 가정에서 육아와 집안일을 동일하게 나눠 하도록 노력했다. 코델리아 파인은 부부들과 같은 노력을 하지는 않았지만, 아이들이 보는 책이나 교육과정에서 평등한 성교육을 방해하는 문화적인 신호들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나는 이들 전문가만큼은 아니지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문화환경이 우리를 얼마나 은밀하고 강력하게 규정하고 있는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가까운 예로 나의 조카를 떠올려본다. 조카는 어린이집에 가기 전까지 부모들이 걱정할 정도로 변신로봇류를 좋아하던 여자 아이였다. 그런 조카가 어느 순간 로봇을 집어던지고 분홍색과 공주 코드에 집착하는 것을 보았을 , 당시에는 나도 여자 아이니까하고 인정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젠더, 만들어진 (Delusions of Gender)> 나의 이러한 고정관념을 보기좋게 깨주었다. 모든 급격한 변화가 성호르몬 영향 때문이나 생물학적-선천적으로 다르게 배선된 뇌구조의 차이 때문이 아니라, 아이들을 둘러싸고 있던 성차별적환경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여성들이 자신들은 여자라서 수학을 못한다라고 하는 말을 듣게 되면 이것은 사회에 형성된 편견의 영향을 받은 개인이 그렇게 선택한 이라는 나의 막연한 견해가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당연히 어느 집단이 이러한 결정을 내리고 있다면, 그건 개인의 문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인 마취 작용과 같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말은 여성과 남성사이에 해부학적/생리학적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차이는 특정 분야의 지적 성취와는 무관하다는 , 그리고 과학기술 분야에서 여성들이 보다 선호하는 이유는 사회심리학적인 편견의 결과라는 뜻이다. 테스토스테론이라는 성호르몬에 의해 여성과 남성의 생물학적/생리학적 차이가 존재하더라도, 차이가 어느 집단의 우열을 가리는 문제와는 무관한 일이다. 이것은 어떤 근거를 선택하여 주장하느냐에 달려 있는 문제일 뿐이다.

 

     책을 읽으면서 아쉬웠던 점은 저자가 여성과 남성에게서 보이는 차이(행동의 차이든 테스토스테론에 노출된 차이든 혹은 뇌구조의 차이든) 과소평가하려는 경향이 있는 같다는 점이다.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아 반론의 여지가 있는 점들을 사소한 차이라고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저자는 타인의 실험과정 결과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하고 잘못 해석될 가능성을 설득력있게 제시한다. 반면 내가 저자의 연구에서도 파고들어 의문을 제기한다면 명확한 대답을 얻기 힘들만한 부분이 보인다. 저자는 부분에 시간을 따로 할애하지는 않은 것같다. 오히려 저자가 여러 연구들에서 보이는 사소한 차이 무시하기보다 여기에 주목하고, 다른 연구자들의 편견에 의해 잘못 해석되고 있는 점을 지적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내가 저자라면 남녀간의 사소한 차이 무시하고나 덮어두는 것보다, ‘인간의 여성과 남성은 이러한 사소한 차이에도이러한 차이가 여성과 남성의 지적 성취 우열을 구분하는 근거가 되지 못함을 보여주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평등 의미란 무엇일까

     책을 읽으며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들 중에는 양성평등 의미를 되묻게 하는 상황을 여러 맞게 되었다. 과연 평등 의미를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던가하는 의문이 들었다. 구체적인 상황에서 평등 의미를 물을 우리는 모든 상황에서 50:50으로 역할이나 몫을 분담하는 기계적이고 산술적인 평등 의미만을 막연히 주장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리고 잣대로 타인에게 강요하거나 심지어는 고통을 주고 있지는 않은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누군가 모든 직업 분야에서 여성도 남성과 동일한 기회와 일자리를 배분해야한다라고 주장한다면 차체만으로도 많은 문제를 불러올 있다. 따라서 우리가 추구해야하는 평등이라는 것은 기계적 산술적 평등 의미로 한정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자본주의가 태동한 이후, 혹는 산업혁명 이후 변화된 인간의 조건 우리가 현재 인식하고 있는 평등 의미가 연관되어있지는 않을까 생각해볼 있다. 예컨대 과학기술의 영향을 받은 산업혁명과 자본주의의 결합으로 여성과 남성에게 동등한 기회 주는 경제적 평등 생각해봄직하다. 오히려 경제적 관념이 반영된 평등 여성과 남성에게 대등한 기회를 부여하고 있으므로 자체로 이상적으로 보일 있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 모든 분야에 적용되면 여성과 남성의 생물학적/생리학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과연 모두가 행복하고 만족할 있을 것인가를 고민해볼 있겠다. 이는 분명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문제를 안고있다. 남성이 여성처럼 임신할 없는 생물학적인 문제에도 여성에게 동일한 노동의 강도를 요구하거나, 휴가없이 남성과 동일하게 일을 강요하게 된다면 이것이 공평한 문제인가 반문해볼 있다. 따라서 평등이라는 말을 우리가 사용할 , 보다 주의를 기울여 개념이 적용되는 상황을 민감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누군가는 동등한 기회를 부여받는 동등한 경쟁자로서 인식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문제는 기계적이고 산술적인 평등 신조를 서로에게 강요하게 (예컨대 명문화된 규정이나 등으로 강제력을 띠게 ), ‘평등 의미가 부여할 있는 폭력성 대해 생각해볼 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 윤리적인 판단을 필요로할 , 상황을 둘러싼 환경과 이와 연관된 사람들의 입장을 모두 고려해야하는 것처럼, 평등의 개념을 현실에서 적용할 보다 유연하고 상대적인 가치를 염두해두어야 것이다.        

 

 

  만들어진 , ‘젠더 의미에 까까워진 기회

     책을 읽게 되면서 젠더 의미에 대해 눈길을 주게 되었다. ‘젠더 단순히 여성과 남성을 나누는 대체물이 아니라 사회학적으로 의도된 결과임을 깨닫는다. 페미니즘의 방향이 앞으로 어떠해야하는가라는 문제는 너무나 근본적이지만 한편으로는 복잡한 문제다. 그만큼 세상의 절반인 여성들의 전반에 이들 모든 문제가 관여되어 있으며, 해결의 실마리도 우리의 전반에서 찾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사회학자 파멜라 스톤 여성들이 경력을 단절하고 가정으로 향하는 진정한 이유는 가정 성불평등 때문이다."라고 말한 점에 공감하며 다시금 삶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어떤 문제가 우리의 전반에 배어있다면 문제는 일상에서, 좀더 구체적으로는 가정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낼 있겠다. 나아가 새로운 방향으로 문제의 해결책을 실천해나가는 것으로 시작해볼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성과 남성이 서로에 대한 생명을 붇돋아주고 존중하기 위해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찾아야 한다는 점이다. 가정 내의 성불평등은 부부가 설겆이를 50% 나눠하거나, 청소 구역을 절반 나눠하는 문제를 넘어 서로에 대한 존중과 배려의 마음가짐을 갖는 그리고 작은 것부터 실천해나가는 것이 더욱 근본적인 출발점이 있을 것이다. 나는 책을 읽고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인간이 타인 주변환경과 상호작용하며 스스로 형성되어가는 섬세한 존재임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저자가 책을 쓰게 된 동기

"뉴로섹시즘은 고정관념의 손상, 한계, 잠재적 자기 성취를 촉진한다. 3년 전 나는 내 아들의 유치원 선생이 아들의 뇌가 감정과 언어를 연결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책을 읽는 걸 발견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쓰기로 결심했다."(254면)

1장 시작부분 - 성전환자 Jan Morris의 말 인용

"여자 대우를 받을수록 나는 더 여성스러워졌다. 싫든 좋든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차를 후진시키거나, 병마개를 따는 일에 무능력하다고 생각하면 이상하게도 나는 그 일에 서툴러졌다. 알수 없는 일이지만, 사람들이 내가 들기엔 상자가 너무 무거울 거라고 하면 실제로 상자는 무거웠다."

"나는 광대하다. 내 안에는 다수가 존재한다." (월트 휘트먼의 말)
- 심리학에서 개인의 다양한 자아 중에서 선택된 특정 자아를 일컫는다. 활동자아(active self)는 매 순간마다 사회적 환경에 따라 변하는 역동적인 카멜레온에 가까운 자아이다.(1장 참조)

*사회학자 파멜라 스톤의 말(7장 참조)

"여성들이 경력을 단절하고 가정으로 향하는 진정한 이유는 가정 내 성불평등 때문이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말(7장 참조)

"남성도 부모이긴 마찬가지이고, 실제로 남성이 집안에서 동등해지기 전까지는 여성이 집 밖에서 동등해지는 일은 절대없다."

"당신의 딸이 여성적 방식으로 세상을 접하는 건 당신의 딸이 가진 소녀의 뇌 때문이다."(10장 참조)

*거리언 연구소에서 출판한 <It‘s a Baby Girl!>(2009)에서 인용한 문구. 이 저서는 여성과 남성이 다른 뇌 구조(생물학적, 선천적 차이)로 인하여 남녀 행동의 차이를 지지하는 입장으로, 후천적,문화적 영향에 대한 고려를 무시하고 있다.

*영장류 학자 프랜시스 버튼의 견해(11장)

"영장류의 태아기 호르몬이 그 개체가 태어나 속하게 될 특정 사회에서 자신의 성에 맞는 행동을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영향을 미친다."

- 곧 이 말은 성별에 따른 다른 행동 양식은 선천적인 영향(호르몬 등의 영향)에 의한 문제에 결정적인 영향이 있는 것보다 사회심리적 영향이 매우 지대함을 암시한다. 유전자가 남녀로 하여금 수학을 좋아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인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또 다른 영장류 학자 윌리엄 메이슨의 견해(11장)

"부모 행동에 대한 설계는 유아기에 이미 존재하고, 양성에서 동일한 형태로 나타나며, 평생 계속해서 드러난다. 그러나 유아에 대한 관심은 성에 따라 나누기 시작한다."

- 여기서 엿볼 수 있는 점은 ‘부모 되기 행동‘이 유전자에 의해 프로그램되어 평생 영향을 주고있다는 점인 반면, ‘유아에 대한 관심‘은 호르몬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성차별적인 생물학자의 견해 - 조지 로매니스(George Romanes)

"여성의 뇌 무게가 평균적으로 남성보다 140그램 더 적다는 점을 보면, 단순히 해부학적 기반을 가지고도 여성의 지적 능력의 열등함이 뚜렷하다는 걸 기대할 수 있어야 한다. 게다가 여성의 일반 체격은 남성보다 튼튼하지 않다. 따라서 심각하거나 오래 지속되는 뇌 활동에서 오는 피로를 더 견디기 힘들 것이므로, 생리적 바탕을 가지고도 유사한 에측이 가능해야 한다. 실제 사실을 가지고 보면, 여성에게 독창성이 부족하다는 데에서 그 열등성이 가장 눈에 띄게 드러나며, 이는 특히나 더 고도의 지적 작업에서 더 확연하게 나타난다."

- 사회에 영향력을 가진 지식인이 의도한 성차별적 구조를 만드는데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을지 생각해볼 수 있다.

*하버드 의대 교수 에드워드 클라크의 견해(14장 참조)

"(여성의) 지적 노동은 난소에서 뇌까지 위험할 정도로 맹렬하게 에너지를 보내 생식력을 위험에 빠뜨리고, 의학적으로 심각한 다른 질병들을 야기한다."

*교육운동가 레너드 삭스의 견해(15장)

"남녀 뇌의 발달 차이를 무시한 교육 과정은 글 못쓰는 남자아이와 자신들이 ‘수학바로‘라고 생각하는 여자아이를 만든다."

-남녀의 차이를 부각시켜 교육을 성별에 따라 다르게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교육가들의 발언으로서, 남아를 ‘글 못쓰는 인간들‘, 여아를 ‘수학바보‘라고 미리 구분지어 놓고 이에 따른 차별 교육을 ‘맞춤 교육‘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범하게 되는 순환오류이다.

*남여에 따라 다르게 성유형화된 부모들의 기대(17장)

- "전 제 아들에게 농구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야구하는 법도 가르치고 싶습니다."
- "여자아이라면 예쁜 옷을 입혀 주고 인형을 사주고 무용 수업을 받게 해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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