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도킨스의 영혼이 숨 쉬는 과학 - 열정적인 합리주의자의 이성 예찬
리처드 도킨스 지음,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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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나를 무신론자로 이끈 분, 내 인생의 가치관 변화에 꽤 영향을 끼친 분이라 가급적 저작들을 읽어 보려고 노력하지만 어렵다!

내 과학 수준의 한계인가, 상세한 설명들은 제대로 이해를 못하고 일단 지루하다.

당위적으로 적응을 위한 자연선택과 점진적 진화가 "진리"임은 알겠는데 상세한 논증은 제대로 이해를 못했다.

나름 생화학을 전공했는데도 이렇게 모를 수가 있나 약간의 절망감이 들면서도 과학과 대중의 괴리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므로 이 차이를 잘 메꾸는 것이 과학 저술가들의 역할인 것 같기도 하다.

도킨스는 명성있는 과학자답게, 대중에게 흥미를 끈다는 미명하에 과학을 우스꽝스럽고 가벼운 것으로 희화화 시키는 것에 반대한다.

수준있는 문학연구가 대중들에게는 겨우 드라마 캐릭터 분석으로 전락한 세태가 과학 대중화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열심히 반복해서 읽고 또 읽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과학 저술에도 노벨 문학상이 수여되길 바란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도킨스는 과학이 문학과 다름없는 예술적 위대함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에게 과학의 이미지는 일종의 실용주의적 기술 같은 느낌인데, 생명의 탄생과 같은 진리를 찾는 열망은 반드시 실용적 이익이 없다 할지라도 예술처럼 그 자체로서 훌륭한 가치를 갖는다는 것이다.

과학은 단순한 방법론이 아니라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 세상이 만들어진 이치를 알아내는 탐험의 과정인 것 같다.

현실, 그 가슴뛰는 마법이라는 책 제목처럼 과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예술처럼 인간의 감정을 고양시키고 궁극의 기쁨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과학은 가치관이나 신념, 민족이나 종교 등에 의해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진리이므로 과학이 종교를 대신한 도덕적 원칙이 될 가능성에 대한 시사도 신선했다.

도덕적 진보는 종교가 아닌 현실 그 자체를 연구하는 과학을 통해 가능하다는 주장에 충분히 공감이 간다.

인권의 진전, 상호협력주의, 평등의식, 생명존중 등이 과연 종교를 통해 이룬 것인가?

세속적인 국가일수록 양성평등과 개인의 자유, 복지 등에 훨씬 더 앞서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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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에포크, 인간이 아름다웠던 시대 - 셀럽과 스타가 탄생하고, 백화점과 루이 뷔통과 샴페인이 브랜딩의 태동을 알리던 인류의 전성시대
심우찬 지음 / 시공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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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의 우아한 귀부인은 벨 에포크 시대에 살롱을 운영한 유명한 백작 부인이라고 한다.

도판의 색감이 약간 어둡지만 전체적을 잘 만들어진 책이다.

아쉬운 부분은 책 내용 자체가 다소 전문성이 떨어지는 느낌이라는 점.

감정의 과잉이 많고 인물 나열에 그친 점이 아쉽다.

필자가 전문적인 학자가 아니니 어쩔 수 없는 교양서의 한계 같기도 하다.

벨 에포크 시대에 관한 다른 번역서를 더 읽어 봐야 할 것 같다.

문화의 중심이 파리에서 뉴욕으로 넘어가기 직전, 세상의 급작스런 변화와 함께 당시 최강대국이었을 프랑스의 불꽃 같은 시대에 문화적으로 만개한 당시 상황이 잘 그려져 있다.

단순히 럭셔리 브랜드로만 알았던 루이 뷔통의 창업 이야기를 인상적으로 읽었다.

귀족들에서 대중으로 고객층이 바뀌는 시대의 변화를 잘 포착했던 것 같다.

에밀 갈레의 유리 공예품은 감탄하면서도 어쩐지 약간은 촌스럽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적어도 책에 소개된 와인병은 너무나 매혹적이다.

저자가 첫 장부터 찬탄하면서 소개한 알폰스 무하의 포스터는 신선하기도 하지만 현대적인 눈으로 보기에는 다소 과한 느낌이 든다.

비슷한 시대의 클림트 그림은 여전히 강렬한 감동과 세련미를 주는데 비해서 말이다.

유화와 포스터의 차이인가 싶기도 하다.

어쨌든 프랑스의 이 문화적 자산이 너무너무 매력적이고 좋다.

저자도 파리를 아주 많이 사랑하는게 느껴진다.


<오류>

297p

게다가 1961년부터 니델마이어 음악원의 교수가 되는데 이때의 제자가 바로 가브리엘 포레였다. 

-> 생상이 니델마이어 음악원의 교수가 된 것은 1861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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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로 산다는 것 - 가문과 왕실의 권력 사이 정치적 갈등을 감당해야 했던 운명
신병주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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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인물들을 나열한 이런 연대기적 구조는 어쩔 수 없이 지루해지는 듯하다.

거의 다 아는 내용이라 신선함이 적고 자잘한 오류들만 눈에 띄어 확인하느라 집중하지도 못해 아쉽다.

역사학자의 책이라 흥미 위주의 야사는 없어 믿음이 가지만 단순히 사실들을 나열하는데 그친 느낌이다.

좀더 분석적으로 조선 시대 왕비의 역할에 대해 고찰했으면 훨씬 흥미로웠을 것 같다.

조선 전기에는 왕비들이 여러 대군과 공주들을 낳았는데 후기로 갈수록, 본부인은 물론이고 후궁에게서도 자식을 많이 얻지 못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정말 성에 대한 유교적 억압 때문에 출산력에도 문제가 생긴 것일까?


<오류>

24p

이어서 강씨는 당시 최고의 실세이며 개경 최고 명문거족이었던 이인임의 집안에서 큰사위를 맞이했다.

-> 신덕왕후 강씨의 딸 경순공주가 이인임의 조카 이제와 혼인했는데 이성계의 막내딸이라 큰사위라는 표현은 안 맞는 듯하다.

26p

특히 방번이 공양왕의 사위라는 결정적인 약점을 들어

-> 무안대군 방번은 공양왕의 조카사위로, 장인이 공양왕의 형 왕우이다.

45p

소헌왕후는 세종과의 사이에서 8남 2녀를 두었다. 세종이 5명의 후궁 사이에서 10남 2녀를 생산한 것과 대비해보면 부부 금슬은 상당히 좋았다고 볼 수 있다. 태종의 경우 왕비인 원경왕후와의 사이에서 4남 4녀를 둔 반면 9명 후궁과의 사이에서는 8남 13녀를 두었다.

-> 큰아들인 양녕대군을 30세의 늦은 나이에 늦둥이로 얻은 것인가 싶어 찾아보니 그 전에 세 명의 아들이 일찍 죽었고 막내로 알려진 성녕대군 이후에도 아들을 출산한 기록이 있다. 그러니 실제로는 8남 4녀를 둔 셈으로, 자녀 수만 가지고 단순 비교하기는 애매한 것 같다.

138p

그때까지 적장자 남편의 세자빈에 이어 왕비의 자리에 오른 인물은 단종의 왕비인 정순왕후 송씨가 유일했다.

-> 정순왕후는 세자빈이 아닌 왕비로 간택되었다.

235p

인열왕후는 용성대군을 낳은 지 7일도 채 못 되어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다.

-> 용성대군은 1624년에 태어나 1629년에 사망했고 인열왕후는 1635년에 다른 대군을 낳다가 사망했다.

252p

남편인 인조는 물론이고, 효종과 현종, 그리고 인선왕후, 명성왕후, 인원왕후 등의 며느리들도 그녀(장렬왕후) 보다 앞서 생을 마감했다.

-> 인원왕후는 장렬왕후가 사망한 후에 들어온 증손부이고, 그녀보다 먼저 사망한 이는 인경왕후이다.

291p

인현왕후는 장희빈이 쫓겨날 상황이 되자, 명성왕후에게 "왕의 은총을 입은 궁인이 오랫동안 민간에 머물러 있는 것은 사체가 지극히 미안하니 다시 불러들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라고 건의했고

-> 장희빈이 쫓겨난 때는 1680년이고 인현왕후가 입궁한 것은 1681년이라 왕비로 들어왔을 때는 이미 장희빈이 출궁한 상태였다.

340p

선인태후는 송 영종의 비이자 철종의 모후로 수렴청정하며 

-> 선인태후는 신종의 모후이고 철종의 조모이다.

348p

힘겹게 초간택에 임한 1743년 9월 28일 혜경궁은 놀라운 기억력으로 19세 때의 모습을 기술하고 있다.

-> 19세가 아니라 9세이다.

388p

효현왕후는 1837년 2월 26일 10세의 나이로 1세 연상 헌종의 세자빈으로 간택되었다.

-> 세자빈이 아니라 왕비로 간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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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으로 읽는 유럽사 - 세계의 기원, 서양 법의 근저에는 무엇이 있는가
한동일 지음 / 글항아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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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너무 흥미로운데 내용은 지루하고 이해가 다 안 돼서 아쉽다.

법학은 너무 어렵다는 말 밖에 안 나온다.

앞서 읽은 중국 고대 법률과의 차이는, 중국의 경우 유교주의 즉 위계를 분명히 하는 도구로써의 예를 법으로 정한 것이 근본인 반면, 유럽 법률은 로마법이라는 보편적인 보통법이 있고, 중세를 거치면서 각 도시의 자치 규약이나 관습들이 법으로 규정됐다는 점이다.

도덕교화와 조상숭배의 유교와, 신을 중심으로 한 여러 민족들의 보편성을 중시하는 기독교의 차이라고 해야 할까?

고대로부터 중앙집권국가를 이룬 중국과 근대까지 도시를 중심으로 한 지방 분권 체제였던 유럽은 확실히 다를 수밖에 없는 듯하다.

일종의 조상숭배 종교라고 할 수 있는 유교와 기독교의 차이도 분명해 보인다.

제대로 이해를 못해 다시 읽어 봐야 할 것 같다.



<인상깊은 구절>

269p

처음 1000년 동안 교회법의 권위와 정의는 그 정점에 달했습니다. 그 영향으로 교회의 법령이 일반시민법보다 상위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성경이 법률적 차원의 공동유산이자 공통 규범으로 자리잡고, 점차 모든 것의 근원으로 분류되었지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데 성경이 모든 것의 원천이 될 수 없음을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점은 오늘날 그리스도교를 믿는 종교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인류 역사상 종교와 신앙의 가치가 정점을 이루었던 중세 시대에조차 성경의 가치만으로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이미 한계를 드러낸 것입니다. 이에 중세 사람들은 성경의 가치를 유념하되 세속 학문과 연계해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중세가 하나의 교리와 신조만을 강요한 사회가 아니라, 오히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탄력적인 사고를 견지했음을 알려줍니다.

352p

조합규약을 작성할 때 구성원의 교육 수준에 따라 어떤 조합은 라틴어로 했고, 교육 수준이 떨어지는 곳은 자신들이 쓰던 언어로 했는데, 이것이 바로 훗날 루터가 라틴어 성경을 대중이 이해하도록 번역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독일이 특히 앞섰는데, 라틴어로 작성된 관습 모음집을 독일어로 옮긴 <작센슈피걸>은 루터의 성경 번역보다 300년쯤 먼저 작업됐지요. 우리는 현대 독일어가 루터의 독일어 성경 번역으로 인해 발전했다고 알고 있지만, 이것은 오해입니다. 종교 도서, 그중 성경은 성직자든 누구든 어떤 개인이 이뤄낼 수 있는 작업이 아니었습니다. 행여 어떤 개인이 번역할 수 있다고 해도 이를 공식 번역본 성경으로 인정하는 데는 기존 권위가 뒷받침되어야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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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으로 읽는 중국 고대사회 - 중국 고대 법률 형성의 사회사적 탐색 현대의 고전 14
취퉁쭈 지음, 김여진 외 옮김 / 글항아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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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도 어려워 보이고 두께도 상당해 긴장했는데 생각보다는 재밌게 읽었다.

항상 느끼는 바지만 좋은 책은 대체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쓰여있고 주장과 근거가 명확해 논리적 흐름을 따라가기가 용이하다.

책의 주제는 중국 고대 법률은 유가의 윤리와 예교에 의해 지배되었다는 것이다.

서양의 법률이 어떤지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법률의 유학화가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한다.

효도가 단순히 부조 자식간의 정 같은 사적인 감정이 아니라 법에 의해 규정되는 매우 공적이고 강압적인 이데올로기였던 셈이다.

가장, 즉 아버지는 가족 구성원에 대해 생사여탈권을 가진 절대적인 존재이다.

가족이 확대된 문중 역시 족장이 구성원들에게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할 수 있고 법적으로 보장이 된다.

대신 가장은 국가에 대해 구성원들의 잘잘못을 책임져야 한다.

반란을 일어나면 삼족을 멸하는 것이 이런 사회 구성원리 때문이었나 보다.

고대 사회는 한마디로 개인이 없는 집단주의 사회였던 것 같다.

혼인 역시 개인의 결합이 아닌 가문의 결합이므로 반드시 중매를 통해 이루어지고 며느리가 되는 의례가 아내가 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래서 육례에 시부모를 뵙는 의례가 포함됐던 모양이다.

개인적인 감정으로 결합한 첩은 노복과 비슷한 대우를 받았다.

혼인의 목적은 부부 중심의 가족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낳아 대를 잇고 조상을 모시는 제사를 지내기 위함이었다.

남편은 아내에게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지만 단순히 아내를 미워해서 쫓아낼 수 없고 그 아버지, 즉 부모에 의해 출거가 결정됐다.

한마디로 시부모를 잘 모시면 싫든 좋든 계속 살아야 하고 시부모 눈밖에 나면 아무리 정이 좋아도 이혼해야 하는 것이다.

유가와 법가의 대립이 결국은 유가의 승리로 끝나면서 도덕교화, 즉 예치주의에 약간의 법가적 개념이 들어가 유교주의 법률이 형성된다.

강상을 어기는 것이 가장 큰 죄가 된 것이다.

사적인 복수를 허용한 것이 국가를 대신한 일종의 자치적인 해결법이었다는 지적이 신선했다.

정조가 자신의 정절을 의심한 이웃 노파를 칼로 찔러 죽인 여자를 의롭다고 칭찬하고 방면했다는 일화가 이해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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