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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성에 비해 잘 풀린 사람 - 월급사실주의 2024
남궁인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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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봤던 드라마 <사랑의 이해>가 생각났다.

그 드라마도 소설원작이랬다.

은행원들 이야기였고 멜로가 있었지만 그 드라마에서 내가 본 건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은행은 내게도 익숙한 공간이어서 그 공간에서 일하는 사람사이의 공기의 밀도, 긴장감들을 함께 느꼈다. 내가 그 공간에 있을 땐 정규직 비정규직은 없었다. 다만 그때는 고졸 대졸이 나뉘었고 경력이 다르게 입사하지만 여자라면 같은 단계에서 누군가 조금 위에서 시작하고 누군가는 조금 아래에서 시작하는 정도였다. 아마 그때 대졸 여행원을 막 뽑기 시작한 무려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은행이라는 조직이 갖는 긴장감이나 단순하고 고지식한 면 그 속에서도 정치도 있고 무리도 있는 것들을 보면서 변했지만 변하지 않았구나 하는 걸 느꼈었다.

 

일을 위해 모인 공간에서 일은 어렵지 않다.

물론 일이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필요하고 개인의 능력이나 기질에 따라 능률이 다르기는 하지만 어찌어찌 해내거나 포기하고 다른 일을 알아보거나 등 일이 주는 무게감이나 스트레스는 크다고 할 수 없다.

어쩌면 일을 해내는 건 디폴트값이고 다른 자잘한 것들이 더 힘들게 한다.

사람들이 모여 일을 하는 곳, 같은 목적을 가지고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일은 단순하다

일을 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과의 관계가 미묘하다.

일은 매뉴얼이 있고 숙지해야할 규칙이 있다.

서툴더라도 시간이 해결해 줄 때도 있다.

그러나 관계는 매뉴얼이 없고 개인마다 취향이 다르고 원하는 바가 다르고 느끼는 감각이 다르다. 나같으려니 하고 좋은 마음으로 다가갔다가 상처를 입기도 하고 상처를 주기도 한다.

차라리 분명한 선과 악이 있으면 편안할탠데 사람이란 그런 존재가 아니다.

누군가에게 한없이 믿음직한 직원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까칠하고 알 수 없는 상사이기도 하다. 어제까지 괜찮았던 사람이 사소한 문제 사실 사쇠한 문제란 없다. 내게 절대절명이지만 타인에게는 그까짓것 하는 문제로 등을 돌릴 수도 있고 스트레스를 얹어주기도 한다.

 

일만 하자 일만

하고 일에 묻히는 게 차라리 나아서 누구와도 관계하지 않고 혼자 외롭고 고독하게 일만 하면서 출퇴근을 할 수도 있다.

그러다 보면 월급이 쌓이고 올라가고 다른 충족감이 생긴다.

그러나 지금의 월급생활 아니 모두를 뭉뚱그려서 노동을 하고 댓가를 받는 일들이 그렇게 뿌듯하고 자존감을 올리는 일이 아니게 되었다.

죽어라 일하는 개미는 여전히 개미일 뿐이다.

죽어라 해야하는 일을 얻는 것도 힘들고 운 좋아서 일을 얻어도 그 일을 하다가 죽는다는 것이 명예로운 일이 더 이상 아니다. 그냥 한마디로 개고생이 된다.

죽어라 충성해도 내게 돌아오는 건 쥐꼬리만한 월급과 어디 썼는지도 모르게 쌓여가는 대출과 스트레스와 직업병 등등이라면 내가 무엇을 위해 노력하고 애써왔나 우울하다.

가족도 내가 노력함을 알아주는 게 아니라 당연히 해야할 일을 하고 있는 거 아니냐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면 나는 여기서 무엇을 위해 살고 있나 회의감을 들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가족 구성원 역시 태어나 자라면서 배워 온 것이 노동은 신성하다. 노동은 필요하다. 노동을 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말라. 등등 한만큼 가져가는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라는 걸 배워왔다. 나 역시 그렇고 가족 역시 그렇다.

그러나 그렇게 노동을 신성하게 여기고 인생에서 꼭 해야할 무언가가 되면서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면서 노동에 속박된다.

하지 않으면 죄책감이 들고 사회 부적응자같고 도태되어버린 것 같아서 찝찝하지만

하는 순간 언제 이곳에서 탈출할 수 있나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소설들은 노동을 하고 월급을 받는 (주급을 받든, 자영업이든 일을 준비하드) 사람들의 이야기다.

내가 원하는 걸 하게 되었으니 불행하다고 해서는 안된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고 열심히 할 수 있는 것만 있다. 그러니 미래 어떻게 될지 몰라도 지금 열심히 할 수 밖에 없다. 불평은 하면 안된다.

이건 윗세대도 나도 지금 세대도 머릿속에 가진 생각이다. 얼마나 비중을 차지하는지는 다를지라도....

일을 하게 된 것에 감사하라

하다가 더 좋은 곳으로 가면 된다.

눈만 높아서 좋은 일만 하려고 하고 자기 주제는 모른다.

일단 시작해야지 고르면 어떡하나

언제까지 꿈을 쫓을 수는 없지 않니? 뭐라도 시작해 봐

그렇게 나를 낮추고 맞춘다. 내 팔다리를 자르고 몸을 우겨넣어서 맞춰주고 기다리지만 조직은 세상은 내가 맞춰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아 아게 아닌데 싶은 순간 나는 조직이라는 톱니바퀴에서 나올 수 없다. 이미 리듬에 맞춰 돌아가는 그 속에서 나오는 건 또다른 용기가 필요하다.

 

한때는 정의가 이상이 그리고 사명감이 일을 하게 했다.

아이들을 잘 가르치고 세상에 떳떳하게 내보내는 일

조금 엄격하고 깐깐하지만 그렇게 해서 적확하고 바르게 배워야 한다고 믿었는데 알게 모르게 세상은 바뀌었고 정서가 중요하고 공감이 중요하고 아이들의 마음이 더 중요해졌다.

틀린 말이 아니지만 그동안 내가 해 온 방식이 아니라고 한다. 그건 억울하다.

나도 최선을 다했고 노력했다.

그러나 내가 틀렸다고 하고 그 결과가 수입이 줄어드는 것으로 눈에 명확하게 보여진다.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귀찮아하는 게 아니라는 건 알지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 아이 때문에 내가 화가 나고 불편한 게 아니라는 건 알지만

그냥 누구든 만만한 사람에게 나도 화를 내고 퍼붓고 싶을 때가 있다.

결국 돌아서서 다시 아이를 맞이 하겠지만

지금 내가 좋다고 내가 옳다고 말하면서 도와달라는 아이를 어찌 거절할까

그 순간은 돈으로 환산되는 노동이 아닌 사명감으로 채워지는 노동의 시간이다.

 

직장이 없어지고 임금을 줄 수 없는 사업장도 딱하지만 그런 사업장을 믿고 참고 기다리면서 노동을 해온 노동자들도 딱하다면 더 딱하지 않을ᄁᆞ

관계에서 내가 잘못을 했을지라도 나만 잘못한 것도 아닌데

교통사고도 일방적인 100%라는 건 없는데 관계에서는 그것도 직장에서 관계에서 갈등이 생기면 결국 약한 존재가 물러나고 포기해야하는 일이 빈번하다.

그런 경험이 쌓이면 가능한 내 둘레에 견고한 벽을 쌓고 어떠한 실수도 하지 않겠다. 어떤 틈도 잡히지 않겠다는 마음이 앞설 수 밖에 없다. 그렇게 하다보면 결국 주변사람들이 불편해지고 그 원인이 나에게 돌아온다. 불편하게 만들고 싶었는데 아니라 나를 보호하고 싶었던 그 벽들이 결국 나를 공격한다.

흔히들 자격지심이라고 하는 그런 것들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경험치가 쌓이면서 내가 나를 지킬 수 밖에 없다는 절박함들이 그렇게 만든다.

지금의 일은 함께 가자가 아니라 각자도생이다.

잘하면 내탓이고 못하면 니탓이거나

잘하면 조직덕이고 못하면 너의 무능력이거나

잘할 필요가 없다 못하거나 책을 잡히지 않으면 된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털어놓는 일조차 책잡히는 일 리스트에 들어가는 세상이다.

 

내가 속한 조직이 조금 더 잘 되고 그래서 내게도 뭔가가 흘러 넘쳐서 얻는 게 있고

그러려면 내가 열심히 하는 것이지만

그 열심히 안에는 누군가를 밟고 올라가는 종목도 분명히 있다.

거래처에서 좀 더 우위를 점하고 가맹주들에게 비위를 맞춰가며 더 얻어내야 하는 것들이 있다. 승진이 걸려있고 정규직 전환이 걸려 있고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길들이 걸려있다.

포기가 쉽지 않다

거기까지도 죽을둥 살둥해서 올라왔는데 저기가 고지인데....

<나의 해방일지>에서 창희는 늘 그랬다 여기까지 왔는데 더 버텨야지 그러려면 서울로 이사가거나 차가 있어야 하는데....

말로 투덜대는 창희는 가맹점주에게 최선을 다한다.

덜렁덜렁 껄렁거리는 거 같아도 그들 말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고 노력하고 애쓴다.

어쩌면 진영도 그런 사람인지 모르겠다.

꽤 인정받고 앞날이 보장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스스로 그 길이 아니었구나 하고 돌아서는 창희처럼 어쩌면 휘청거리지만 꺽이지 않을만큼 단단했던 창희처럼 진영도 조금쌕 때는 묻어가지만 어느 순간 아니라고 느껴질 때 칼같이 돌아서길 기원한다.

진영은 절대 인성에 비해 잘 풀린 사람이 아니다.

잘 풀렸다고 하기도 그렇지만 인성에 비해.. 그건 아닌 거 같다.

선영의 무심한 말들이 턱턱 걸리면서 내가 준비한 매뉴얼과 다른 반응에 늘 멈칫하는 사람이라면 그렇지 않다.

가끔 사람은 내가 잘 아니까, 으래 그려려니 하는 마음으로

타인도 나와 같을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것들이 보편이고 상식이라고 믿어버리면 그 상식을 타인고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나 역시 그랬고 그래서 꺽였고 상처입고 상처를 주고 살고 있다.

나의 상식과 보편은 그냥 내 것이다. 나와 다른 타인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순오와 진영이 전혀 다르듯이 진영과 선영이 다르듯이

그걸 진영이 알고 받아들이면 진영도 괜찮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알았다. 나도 온라인이나 올영에서만 화장품을 사고 있었구나,)

 

흔히 듣는 말

정 안되면 쿠팡물류알바나 하지

쿠팡 물류알바 알아보고 있어요

하루 가기로 했어요

다녀왔는데 할만해 또는 진짜 죽겠어 못해 못해

쿠팡이 새로운 일자리 창출은 하긴 했나보다.

쉬운 일이 아니라는 말은 들었고 그래도 일에 비해 보수가 좋다는 말도 있고

할만하다는 말도 있지만....

그래도 한달을 버티고 있는 주인공이 장하다.

그 짧은 순간에도 정치질이 있고 스트레스를 풀 전용갤러리가 있는지 몰랐다.

사람이 몰리는 곳에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모든 행위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어디서든 살아남는 것이 사람이다.

도지윤마저 응원할 줄이야.... (그래도 방구성키보드 워리어가 아니라 몸을 쓰는 노동의 세상으로 들어갔다는 것에 박수를 보낸다. )

 

왜 사람들이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는가

최근 기사에서 여학생을 일찍 학교에 입학시키면 결혼을 할 확률이 높다고 했나 출산할 확률이 높다고 했나

참 애쓴다... 라고 말하고 싶다.

출산율이든 출생율이든

왜 여자들이 결혼하고 싶지 않고 아이를 낳고 싶지 않은지 모를까

이 나이 먹은 나도 아이를 낳지 않는 게 더 낫고 결혼을 하지 않는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말이다.

자고로 여자란 결혼을 해서 남자들 뒷바라지를 하고 아이를 낳아 잘 키우는 것이 디폴트였는데 그걸 하지 않는다. 세상이 말세구나

해야할 당연하 일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왜 그것이 당연하다고 나는 생각을 할까를 먼저 고민해야지 왜 당연한걸 안하고 지랄이야... 이렇게 접근하면 해답이 없다. 정답도 없다.

결혼이 손익계산을 따져야하는 행위는 아니다. 그렇다고 마냥 낭만으로 덕지덕지 쳐바르는 행위도 아니다. 어쨌든 현실이다. 현실이니 손익도 필요하고 그렇지만 신뢰를 기반으로 함께 나아가자는 약속이니만큼 어느 정도의 낭만도 필요하다. 정말 필요한 건 당사자들간의 합의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당사자의 합의뿐 아니라 두 가정의 부모와의 합의도 필요하다.

어느 정도 지원을 할것인가 어느정도 요구를 할 것인가 미리 합의가 필요하다.

정해진 답이 없다.

상황이 다르고 처지가 다르고 낭만의 크기가 다르다면 답은 저마다 각자가 가지고 있다.

그렇게 합의해서 결혼을 하면 잘 이행해야 한다.

들어갈 때 마음이 다르고 나올 때 마음이 다르면 안된다.

노동을 하고 다시 출근을 하는 일이 생기면 안된다.

인간은 누구아 9to6 일을 마치면 쉬어야 한다. 그래야 내일 다시 같은 시간 일을 반복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는 쉬러가는 집에 누군가는 다시 출근하는 일은 끔찍하다.

아이를 낳아도 지금같이 사교육이 필수인 세상에 아이를 키우기도 쉽지 않다.

이젠 다른 집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알고 싶지 않아도 강제로 알 수 밖에 없다.

정보도 빠르고 소문도 빠르다.

쉽게 뒤처지고 쉽게 기가 죽고 쉽가 열불이 나는 세상이다.

그리고 나 조차 자립하지 못한 경우가 수두룩한데 어떻게 결혼하고 아이를 낳을까

최저 생계비는 점점 오르고 물가도 오르고 월급만 작고 소중해지는 이 시대에 어떻게 아이를 낳고 결혼을 하고 부모를 부양하고 살아야 할ᄁᆞ

내가 나를 부양할 수 있을지 회의가 드는 이 시점에서 ...

나는 그 문제에 빠져있다고 자신할 사람도 없겠지만

내 의사와 다르게 편집되고 잘리고 다시 기워져서 목적에 맞게 조작된 내 말과 내 표정은 영 불쾌하다. 좀 큰 액수의 보상을 받았다고 내가 나의 모든 것을 드러내야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진정성도 상품이 되고 돈이 된다.

그런 감각이 있어야 돈을 버는 모양이다.

나는 보이사가 나쁘다고 할 수가 없다.

감각이 좋고 수완이 좋을 뿐이다. 불법은 없으니까

민지가 순수했다고 하기도 그렇다.

다만 나쁜 건 아니잖아... 라고 생각하는 내가 좀 슬플 뿐이다.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하기 어렵지만 찜찜한 내용이다.

 

이제 아이가 취직을 해야할 나이다.

그렇다는 건 구세대인 나의 기준에서 이다.

이제 방향을 잡고 준비하고 했으면 하는데 아이는 아직도 중구난방이다.

기회가 오면 모든 걸 해보고 싶어한다. 나쁘진 않지만 그렇게 낭비할 시간이 없는데 괜히 내가 마음이 조급하다.

나도 배우자도 늙어가는데 지 혈육도 있는데 언제까지 늙은 부모가 뒷바라지 할 수도 없는데 말이다... 라는 말은 꾹 참지만... 얼른 철이 들었으면 한다.

여기서 철이 들었으면 이란 얼른 내마음에 드는 행동을 했으면 하는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다.

 

월급을 받고 산다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아니지만

인생 초반에는 경험을 할 수 있는 (인생을 100으로 볼 때 20대 중후반은 초반이다.) 경험해야할 일이 아닐ᄁᆞ????

적어도 시작하고 이게 아니었어. 이렇게 살려고 공부한게 아니었어, 야자하고 비싼 사교육비쓰고 엄마한테 욕듣고 한게 아니었다고 후회하더라도

일단 들어가야 할 수 있지 않나????라고 꼰대 엄마는 생각한다.

내가 책에서 뭘 읽은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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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란드의 인기 작가 토르디스 엘바와 호주에서 청소년지도사로 살아가는 톰 스트레인저가 아이슬란드와 호주의 중간 지대,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일주일간 만나 과거의 시간을 돌아본 이 책은 피해자와 가해자가 함께 써내려간 전례 없는 책이다.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끔찍하고도 영구적인 폭력으로서 강간이 일상화된 오늘의 현실을 아프게 일깨우면서, 남녀 모두가 깨어 있는 의식으로 이 문제에 동참할 것을 뜨거운 체험의 언어로 설득한다.

 

나는 너를 강간범이라고 적어도 나를 강간한 사람이라고 불러도 돼. 그렇지만 그 말이 곧 너를 말하는 건 아니야. 절대 아니지. 그 말로는 네가 진짜로 어떤 사람인지 십 분의 일도 나타낼 수가 없어. 난 기억을 잃을 정도로 술을 마신 적이 있어. 하지만 그게 날 알콜 중독자로 만들 수는 없어. 난 가끔 거짓말을 하지만 그게 날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난 강간을 당한 적이 있지만 그게 날 희생자로 만들진 않아. 사람은 평생 살면서 좋은 일도 하고 나쁜 일도 해. 요지는 나는 사람이라는 말이야. 딱지표가 아니고 나라는 사람이 그 날 밤 일어났던 일로 축소될 수는 없어. 그리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p178

 

먼저 사회에 여성 혐오가 얼마나 광범하고도 일상적으로 펴져 있는지 알게 해주는 사례들을 열거했어. 성폭력 강간에 관한 농담 여성의 대상화따위 말이야. 그리고 나서 네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했어. . 가부장제가 너에게 일어났어. 그건 우리 모두에게 일어났어. 그래, 네 말이 맞아 너는 그날 밤 선택의 여지가 있었어. 아무도 너에게 그러라고 강요하진 않았잖아. 성범죄자는 타고난다는 말을 나는 믿지 않아. 그게 만일 남성이 타고나는 본능이라면 세상 모든 남자가 잠재적 강간범이거나 성희롱자라는 말이잖아.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도 남성들에게 가하는 모욕이라고 생각해. 나는 내 아들이 성범죄 성향을 타고났다고 절대로 믿고 싶지 않아 반대로. 난 그 애가 가치관이나 믿음 없이 태어났기 때문에 그걸 잘 정립시켜주는 것이 부모로서 나의 가장 큰 의무라고 생각해. 하지만 그 애는 외부의 영향도 받게 되겠지. 남자가 왜 여자를 범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사회구조. 우리가 서로를 대하는 태도 안에서 찾을 수 있어. 너는 그날 밤 그래도 되는 권리가 네게 있다고 느꼈겠지. 이건 네가 직접했던 말이야.‘ 179

 

나는 갑자기 깨달았다. 그가 자신을 용서할 수 있으려면 내가 행복해야 한다는 걸.

 

아닌 척해 봐야 소용없어. 그런 멍청한 작전은 효과가 없어. 긴장될 때 통하는 유일한 방법은 소리 내서 말하고 웃어 넘기고 그리고 그냥 다시 살아가는 거야.“

 

네가 왜 나를 고소하지 않았는지 가끔 궁금해

글쎄 난 그때 열여섯 살짜리 애였고 머리엔 강간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가득했어. 그런 건 으슥한 골목에서 칼을 든 미치광이나 저지르는 짓이라고 알고 있었어. 내 방에서 강간이 일어나리라곤, 특히 내 남자친구에게 당하리라곤 생각도 못했지. 몇 년이 지나 내가 당한 게 강간이었다는 사실에 눈뜨게 됐을 무렵에는 딱 너처럼 나도 진실을 외면했어. 처음으로 마음을 준 사람에게 그런 일을 당하게 됐다고 믿고 싶지 않았던 거야. 나는 내가 사람들을 믿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랐어. 건강한 연애 관계를 맺기 바랐고 육체적으로 교감하는 순간에 애인에게 거리를 두거나 무시하지 않고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랐어. 교미를 하는 게 아니라 사랑을 나누길 바랐어. 게다가 내가 너한테 미쳐 있는 걸 세상이 다 알고 있었어. 너한테 내 동정을 줬잖아. 우리 부모님한테 널 인사도 시켰잖아. 그날 밤 난 짧은 드레스를 입었어. 술도 많이 마셨고 그랬으니 넌 그런 짓을 안했다고 말만 하면 됐을 거야.“ 228

 

사람이 사람에게 왜 해를 입히는지 오랫동안 열심히 들여다봤더니 몇 가지 촉매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 첫 번째는 분노야. 예를 들자면 네가 나를 애먹였으니 내가 너를 엿 먹일 거야. 그 다음에는 두려움이야. 네가 나한테 위험한 사람이니까 너를 엿 먹여야겠어. 무지도 해당돼. 너를 엿 먹이면 내 병이 나을 거야. 욕심도 내가 원하는 걸 네가 가지고 있으니 널 엿 먹여야겠다. 위급함. 너를 엿 먹이지 않으면 내 일이 꼬일 거야. 마지막으로 정신병이나 중독이 해당돼. 내 머릿속에서 널 엿 먹이라는 소리가 들려. , 네가 그날 밤 어떤 이유로 날 강간해는지 나는 몰라. 내 생각에는 욕심과 무지 때문이었던 것 같아. 너는 네가 원하는 걸 취해버렸어. 그게 나한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상관하지 않고 말이야. 그런데, 나도 그랬어. 나도 욕심을 부려서 내 필요를 그 무엇보다 우선으로 삼은 적이 있어. 내가 다른 사람을 강간한 건 아니지만 내 중심으로 이기적으로 행동하면서 다른 사람 것을 취하는 게 어떤 건지 나도 해봐서 잘 알아. 네가 나한테서 가져간 건 나한테 정말 가치 있는 거였어.

그래서 분한 나머지 온 힘을 기울여 네가 가진 것 중에서 제일 값진 걸 부숴버리려고 했어. 네 마음 말이야. 내 말 오해하지마. 우리 각자의 행동이 같은 무게라고 말하는 게 아니야. 지난 일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나한테 다 사라졌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야. 다만 내가 그 어느 때보다 이해의 영역에 가까이 와 있는 것 같아.

 

복수로 내가 얻는 건 하나도 없어.

 

내가 여자라서 강간했잖아. 그렇게 다뤄도 되는 권리를 네가 가졌다고 생각하는 여자라서, 넌 어디선가 배웠을 거야. 네 즐거움이 내 동의보다 더 중요하다고 내 몸이 너무 안 좋아서 아무것에도 동의할 수 없을 때였어도 말이야. 네가 왜 그랬는지 몰라. 하지만 난 이문제가 남자들이 사회 모든 층위에서 더 많은 힘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현실과 관련이 있다고 봐. 몇백 년 동안 그래왔잖아. 아마도 오래된 이런 전통 때문에 사람들은 당연히 남자가 여자보다 중요하다는 의식을 갖게 됐겠지. 너와 너의 욕망이 나보다 더 중요하다고 그날 밤 네가 느낀 건 아마도 이런 데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내가 아는 한 너는 사람들이 보통 남자라고 부를 그런 사람이었거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우리 사건이 좀 더 큰 그림의 일부분 그러니까 여자가 남자보다 가치가 없다는 생각의 일환이었을 거라고 믿어. 네가 불편하게 느낀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생각을 걸러버릴 순 없어.” 282

 

톰 같은 사람이, 즉 규범으로 보이는 것에 잘 순응해서 조사와 감시에서 제외되는 사회그룹에 속하는 사람. 안정된 배경과 각종 특혜를 누려온 사람이 강간을 저질렀고 그래서 후회한다는 고백을 한다면 아마도 사람들이 오래 기다렸던 성폭력의 근원적 이유에 대한 토론의 기반이 마련될 것이다. 사람들이 이런 유형의 강간을 더 잘 이해하려면 가해자를 2차원적 스테레오타입으로 봐서는 안되고 3차원적으로 봐야 했다. 그렇게만 되면 파급 효과가 클 것이고 가능성은 끝도 없었다. 진정 큰 그림이었다. 290

 

그러니 선례를 세우는 게 더욱 중요해지지. 세상 사람들에게 말하는 거야. 이 저울의 양쪽 끝에 선 사람들은 성범죄의 가해자이든 피해자이든 영혼 없는 괴물도 아니고 파손된 물품도 아니라고, 그냥 사람이라고 불완전하고 흠이 있더라도 너나 나처럼 온갖 종류의 생각을 하고 직업과 배경과 생활 방식과 신념을 가진 그런 인간이라고, 세금도 내고 가족도 사랑하고 실수도 저지르는 바로 우리 이웃에 사는 사람들이라고 해변에서 쓰레기도 줍고 말이야. 293

나는 깨달았지. 내가 그 범행을 저질렀고 내가 그 책에 나오는 바로 그 사람이며. 넌 그날 밤에 대해 네 마음대로 말할 권리가 있다는 걸 말이야. 그리고 내가 그걸 읽고 생생하게 되살려보고 인정해야 하고 그것에 대해 미안해해야 한다는 것도 말이야. 네가 그걸 공개하는 데 따르는 어떤 결과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도 이런 경지에 이르고 나니 새로운 감정이 생기더라. 그건 일종의 안도였어. 내가 너를 끌어들인 지옥에 대해 네가 말하고 표현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는 느낌, 너처럼 강인한 사람이 자기와 자기 시련을 드러냄으로써 다른 피해자들에게 위로를 주고 강간이 얼마나 잔인하고 비열한 짓인지 사람들에게 이해시킬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느낌, 진실이 바깥 세상 어딘가에 나와 있고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 진실을 덮을 수 없으니 다행이라는 느낌 너를 범한 사람으로서 이름이 밝혀지지 않았으니 다행이라는 느낌, 그런가 하면 내가 계속해서 익명으로 남아있지는 않으리라는 예감이 드는 것도 다행이었어. 네가 말했다시피 오랫동안 두려움에 갇혀 사는 건 건강하지 않잖아.

 

 

내가 모든 걸 설명할 수 있는 포괄적인 답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나만 유별나고 독특해서 그랬던 건 아니라고 확신하니까. 난 수많은 경우 가운데 하나였어.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다들 아무 말을 안 해. 아마 더 깊이 들어가는 게 무섭겠지. 나는 뭔가 말을 하고 싶어. 네가 책으로 했듯이 말이야. 나도 목청 높여 세상에 알려서 우리 같은 사연이 되풀이 될 가능성을 줄이고 싶어. 402

 

 

 

 

*오랫동안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었다. 누구를 미워하는 일이 너무 당연하고 바람직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고 세상이 모두 내 편을 들지 그 상대를 변명하거나 변호할 리 없다고 하더라도 미움은 너무나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었다. 미워하는 사람을 이제 영영 보지 않는다면 차라리 나을까

늘 일상에서 부딪쳐야 하고 만나야 하는 사람을 미워해야하는 일은 너무 힘이 들었다.

이렇게 미워하기만 하는 내가 옹졸한 사람인가 나를 들여다 보는 일이 꼭 피해자가 나 때문에 모든 일이 일어났다고 스스로를 자책하는 일처럼 느껴져서 절대 그러고 싶지 않은 마음이 절반이상을 차지하지만 한 구석에서는 내가 그냥 미워하는 걸 포기하면 모든게 편안해질텐데 내가 문제가 아닐까 하는마음이 또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다. 분명 상대의 잘못과 폭력성으로 내가 상처를 입고 내가 피해를 당했음에도 절대 변하지 않는 상대를 보면서 계속 미워하고 저주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그건 결국 나의 속좁음이 아닐까 하는 자책만 남겼다. 그러나 나의 미움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그의 사과와 반성이 없이는 아무것도 시작될 수 없다.

이 모든 일이 제자리를 맴돌기만 하는 건 먼저 시작해야 할 그가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아무일도 없다는 듯이 살고 있다는 그것 때문이다. 내 잘못이 아니다.

이러이러한 잘못을 하지 않았느냐고 몇 번을 묻고 대화를 청해도 묵묵부답이거나 도리어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걸 보면 용서따위는 개나 줘버려랴 할 일이었다.

나는 절대 잘못하지 않았다. 그 일에는 이유가 있고 상황이 있고 맥락이 있다고 모든 걸 상황탓으로 자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대탓으로 돌리는 말에 어떤 용서도 화해도 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일 없듯이 하하호호 할 수 있는 표정은 가졌지만 마음은 여전히 얼어있었고 점점 나는 속내와 겉모습이 다른 두 인격을 태연하게 지니는 이상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용서는 사과가 전제되지 않으면 안된다.

사과는 반성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된다.

반성은 진심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무수한 반성과 사과가 남발되면서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도리어 돌을 맞고 편협한 사람이 되고 예민하고 상황파악이 안되는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그 마음이 얼마나 소금밭인지 타인은 모른다.

좋은게 좋지 않냐고... 계속 볼 사이지 않냐고 ... 가족이지 않냐고...

그래서 더 용서가 쉽지 않다. 계속봐야하고 가족이고 친밀한 사이여서 좋은게 다 좋지는 않더라고

책을 읽으면서 내내 저자가 부러웠다. 그렇게 자기 상처를 드러내고 사과를 요구했을떼 이렇게 솔직하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는 상대가 있다는 게 진심 부러웠다.

내가 좋은 사람이 되면 좋은 배우자를 만난다는 말처럼

내가 용감하고 좋은 사람이면 비록 내게 상처를 주고 절망을 주었던 상대여도 이렇게 인간적이고 예의있을 수 있구나 하는 마음에 질투가 생겼다.

폭력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만연한 가부장제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책이며

동시에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을 쉽게 털어낼 기회를 가진 저자에 대해 두고두고 부러워미칠 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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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욕을 한다. 장난이라고 하면서 친구에게 폭력을 쓴다. 불법 영상을 본다. 협박한다.

아이들의 행동은 나쁜 것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아이를 야단치고 처벌한다.

벌써부터 이렇게 나쁜 행동을 하면 나중에 뭐가 되려고 그러니?

나중에? 뭐 지금 당신과 다르지 않은 어른이 되겠지

아이들 대상으로 무언가를 가르치려고 할 때 취해야할 행동은 늘 어정쩡했다.

어른 나쁜 짓거리가 있으니 조심하거라? 혹은 이렇게 나쁜 일을 하면 절대 안된다?

훈계하고 타이르고 겁박하는 것 말고 없다. 부끄럽게도 말이다.

그렇게 고민하던 중 오랫동안 폭력예방교육을 하셨던 선생님의 말씀이 가슴을 쳤다.

그분은 아이들에게 어떤 짓이건 니들이 하는 일은 잘못된 일이고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을 하지 않는단다. 대신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욕도 결국은 어른들이 쓰던거지.

불법 동영상도 어른들이 만들고 아무나 보라고 유통시켰지

범죄도 어른들이 하던거야

말로만 하지말라고 하면 뭐하지 저희들은 나쁜 거 알면서 혹은 모른 척 하면서 다 하고 있는데. 애들한테만 하지마라 잔소리하고 훈계하고 처벌하는거 문제가 있는거 아니냐

우린 그런 어른들이 책임없이 만든 것 행동하는 것 말하는 거 아무 생각없이 따라하지 말자

자존심상하잖니?

저희들은 하면서 아이들한테는 하지말라고 하는거 너무 우습지 않니

우린 진작 안한다~ 이런 마음이면 어떨까?

뭐 더 근사하게 말했지만 난 이렇게밖에 요약을 못하지만 그 말이 가슴을 쳤다.

행동의 잘못을 탓하는 게 아니라 잘못된 점들을 알려주는 것 그것이 모든 폭력을 막는 길이라는 요지였다.

 

요즘 아이들이 무서운 건 무서움을 모르고 있는 어른들의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

자기 흠은 보지도 못하면서 어른들은 쉽게 말한다.

요즘 애들은 우리때랑 달라. 얼마나 까졌는지. 얼마나 무서운지.

그런데 그 무서운 아이를 키우고 훈육하고 자라게 만든건 어른이다.

물론 아무리 좋은 걸 보여주고 들려주고 말해줘도 삐뚤게 자라는 아이들도 있다. 세상은 언제나 다양하니까.

아이들은 어른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

나를 바라보고 말하는 훈계 잔소리 꼰대같은 언어들이 나에게 스며들어 내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무심코 하는 행동들 남들은 모르겠지 하면서 내뱉는 말들 몸짓들 그리고 부끄러움 없는 모든 것들을 습득할 뿐이다. 그게 더 쉽고 자연스러우니까.

 

책에서 가장 좋은 건 서문이었다.

아이는 어른이 없을 때 자란다는 말.

아이는 어쩌면 어른이 없어야 더 잘 자랄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아이들은 지루해서 온몸을 뒤트는 그 순간 자란다고 했다. 숙제가 있고 학원이 있고 시간이 모자라 정신없이 지식을 넣고 교양을 넣고 체력을 키우는 동안 자라는 것이 아니라 아무 할 일도 없고 아무런 것도 배우지 않아서 지루하고 지루해서 온몸이 뒤틀리는 그 순간 아이들은 쑥쑥 자란다고 했다. 그 순간이 통제하고 간섭하는 어른이 없는 그 순간이다.

꽤 괜찮은 어른이 아이들을 위해 쓴 책이다. 정말 희귀한...

좋은 아이들이 사고 없이 아픔 없이 잘 자라만 준다면 분명 좋은 어른이 된다.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까 어떻게 가르칠까 고민할 시간에 내가 얼마나 좋은 어른이 될까 얼마나 괜찮은 사람이 될까를 고민하고 행동하는게 더 좋은 교육이고 양육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아이들은 잘 자라고 있는 중이니까.

 

.... 책에서 배운 것들......

  

있으나 보이지 않는 존재. 있지만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존재는 귀신이 된다.

사랑이 없는 장소는 흉가나 다름이 없다.

관심이 없는 곳도 폐가와 다르지 않다.

집에서 학교에서 나를 찾지 못하고 귀신처럼 살아가는 아이들이 있다. 아니 어른도 있다.

무심했던 사람의 얼굴을 제대로 보았을 때 너무 낯설다.

저 사람이 여기 있었던가? 왜 내가 몰랐을까? 정말 있었던 게 맞을까?

내 무심함은 생각하지 않고 그를 귀신보듯 한다. 그리고 놀라고 악몽이라 여긴다.

 

조용하고 소심하고 여린 목소리를 가진 주인공들이 있다.

말도 못하거나 아예 말을 하지 않거나 하는 아이들

저항을 표현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가지고 있는 볼륨도 저마다 다르다.

묻지 않는 어른들 앞에서 아이들은 입을 잃어버린다.

 

어른이 제 문제에 빠져 정신없는 동안 아이는 너무 일찍 철이 든다.

가끔 그렇게 서둘러 철이 든게 억울해서 아이는 침묵하고 귀를 닫고 입을 닫는다. 그리고 독립을 꿈꾼다. 혼잣말을 한다.

그러면 어른은 의젓하다고 머리를 쓰다듬는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변신이야기는 가능성의 이야기다. 내가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이야기

그건 뒤집어 말하면 내가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당연하다

논리적으로 마땅해서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권위의 강요에 못이겨 부당하게 받아들이기도 한다.

폭력은 대개 강자가 약자에게 행하곤 하지만 그 반대도 가능하다. 어떤 논리나 호소로도 상대의 편견 신념을 깨뜨릴 수 없다면 큰 절망이 폭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문제들은 논리로 해결되지만 마음은 상상력을 발휘해야 이해할 수 있다.

추론의 과정이 누가 그랬지?”에서 왜 그랬지?” 그리고 반드시” “모두그래야 했을까를 생각해야한다.

 

착하다 와 못됐다는 딱 잘라 구분할 수 없다.

 

우리를 서럽고 힘들게 하는 건 삶의 복잡다단한 굴곡일 때도 있지만 과자부스러기 한 조각일 때도 있다. 긴 이야기를 전부 들어야만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단 한 장면 때문에 그 사람 전체를 이해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수 있고 그것이 꼭 착각이라는 법은 없다.

 

사람들의 생활속에 슬픔의 자리를 가 차지한지 꽤 되었다. 슬픔이 내면을 향하는 감정이라면 하는 화는 밖으로 표출되는 감정이다.

슬픈 감정=약한 사람. 슬픔은 권하고 싶지 않다.

슬픔은 화가 지니지 못한 힘을 가지고 있다.

자기 안으로 깊숙이 슬퍼 본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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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살기 위해 매일 하는 일

그러나 누구도 쉽게 그 의미를 생각하지 않는 일

매일 먹거리를 기르고 만들고 먹고 치우고 고민하는 일등등

그 사소한 일상도 사실 정치적인 일이다.

밥상을 차리는 사람, 밥상에 주인처럼 느리게 나와 앉아도 괜찮은 사람

밥상을 타박하는 사람 밥상을 걱정하는 사람

차리는 사람 뒤집어 엎는 사람 치우는 사람  모두가 가진 위치가 다르고 힘이 다르다.

밥상에서 말을 해도 괜찮은 사람이 있고 수저가 들어갈 때만 입을 열어야마나 하는 사람도 있다.

오죽하면 입닫고 밥이나 먹어... 라는 모순된 말도 있을까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있고 들어야 하는 사람이 있다.

성별에 따라 계급에 따라 다른 입장이다,

내가 땀을 흘리고 몸을 써서 그 상을 차리는  사람은 정작 그 상 앞에서 아무런 권리가 없다.

그저 냉큼 와서 앉아 한마디 하고 나무라고 평가하는 사람은 권리뿐 아니라 힘도 있다.

누군가는 보이지 않은 것처럼 후다다가 밥을 우겨넣어야 하는 게 마땅하고

누군가는 혼밥자체가 애처럽고  안타까워 그의 등을 두드려주고 싶다는 캠페인이 펼쳐지기도 한다.

이 책은 그런 먹는 이야기에서 펼쳐지는 관계의 이야기 관계에 응당 따르는 권력의 문제 차별과 혐오의 문제, 아무렇지 않게 구별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들을 다시 돌아본다. 모두 정치적인 문제다.

정치는 저 높은 곳에서 제  할일을 하지 않고 힘겨루기만 하면서도 따박따박  고액의 월급을 쳐잡수시는 분들의 전용물이 아니다

둘 이상 모인 사람 사이에 오가는 관계들 힘의 줄다리기 힐끔거리는 견제와 함꼐 손을 잡는 행위 모두가 정치가 된다.

함께 상을 차리고 먹고 치우는 일  역시 정치의 일부다.

 

 

 

페미니즘은 관계의 학문이다. 살아가면서 점점 다짐하게 되는 삶의 태도는 "남의 입에 밥 넣기를 주저하지 말고 내 입으로 죄 짓지 말자"이다. 관계를 위한 기본이다. 우리는 음식을 나눠 먹으며 말을 섞으며 연결된다.

 

 

여성이라는 집단이 본질적으로 공유하는 자연스러운 취향은 없다. 치향은 온전히 자연발생적인 성질이라기 보다는 습관의 축적, 환경, 교육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다. 여성에게 주로 맡겨진 노동과 역할을 수행하면서 여성 일반의 취향이 남성 일반의 취향과 차이를 보일 수는 있다. 이는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본질적인 차이라기보다. 사회화의 결과다. 또한 여성 일반의 취향이 열등한 성질로 평가받을 이유가 없다. 나아가 여성 집단 내부는 각각 취향의 종류가 다양하고 차이가 있다.

 

취향의 젠더화는 여성화된 취향을 업신여기도록 이끈다.  "여자들이 좋아하는'이라는 말이 붙으면 일단 한 수 아래의 뭔가로 취급된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책, 여자들이 좋아하는 드라마 여자들이 좋아하는 분위기, 여자들이 좋아하는 영화 등 입맛도 여자들이 좋아하는 맛이라고 할 때는 진짜 맛이 아닌 가벼운 맛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취향이란 진정한 예술도 진정한 맛도 진정한 지식도 아닌 세계다. 여성 문제는 진정한 사회 문제가 아니듯이.  

 

 

가부장제란 어머니이 밥으로 아버지의 법을 굴러가게 하는 제도다.

 

성적 대상화, 대상화란 무엇일까 느낄 줄 알며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며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권리가 있는 하나의 인격체가 아니다. 다른 주체의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대상으로만 여기는 태도를 대상화라고 한다. 성적 대상화란 이 대상을 성적인 목적/도구로만 여긴다는 뜻이다. 대상화란 다른 말로 하면 '사물화'다. 생각하고 느끼는 인격체로 보지 않는다. 화(化)는 되다라는 의미다. 여성을 사물이 되게 해 의식이 없도록 만드는 상태가 바로 성적대상화다. 의식이 없는 상태로 여기기에 여성을 식재료나 음식으로 보고 먹는다. 강간을 위해 강간 약물을 사용하는 이유도 여성을 의식이 없는 사물로 만들기 위해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서 홀로 성 관계라는 강간을 한다. 여성을 사물화하는 방식 중 하나가 상납이다. 성 상납에서 성을 남성이라고 생각할 리는 없다, 여성을 남성에게 상납한다.

 

 

매일 똑같은 식단을 구성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렇게 먹어도 되는 사람'인 건 아니다,

 

가난하고 배가 고픈 사람이라고 해서 욕망마저 가난해질 의무는 없다. 오직 배고픔을 해소하기 위해서만 입을 벌리는 1차원적인 입은 언제나 지배권력이 원하는 입이다. 취향 따위는 아예 형성할 수 없는 그런 입, 욕망 할 줄 모르는 입 배고픔에 길들여진 입

그러나 가난한 입도 욕망할 줄 알고 기분이라는 게 있다.

 

 

인간은 기억 때문에 버티고 때로는 그 기억이 고통을 유발한다 해방의 세게인 동시에 영원한 감옥인 기억 기억의 정치화는 바로 기록과 재현이다. 고통스러운 배고픔과 죽음의 행진마저 인간이 기록하고 재현하는 이유가 아니겠는가

 

 

어떤 기억과 함께 떠오르는 향과 맛이 있다.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그 음식을 먹었을 때의 기억, 함께 한 사람들 그 순간의 온도와 빛과 분위기 냄새가 함께 뭉실 떠오른다.

음식은 이성적으로 딱 딱 구격 맞게 정리된 기억이 아니다

그 맛이 주는 감정이 서글픔일 때도 있었고 들떠서 한 없이 몽실거리던 기분이거나 배꼽 아래가 간질간질한 설레임일 수도 있다. 그냥 꾸역구역 참고 밀어넣는 국에 만 밥같은 기억도 있다.

오래 되어 낡은 후라이 팬에서 기름이 보글거리고 그 안에서 조잡하게  모양을 낸 도나츠가 둥실 떠오르는 순간 고소한 기름냄새 끈적거리던 설탕 느낌 그리고 내가 눈독을 들여놓은 가장 동그랗고 에쁜 도나츠를 향햔 욕망까지 그렇게 맛은 몸에 새겨지고 남겨진다.

그래서 나는 엄마를 할머니를 맛과 냄새로 기억하고 추억한다.

그리고 그 추억이 한없이 따뜻하고 행복한 거라고만 믿었다

그런데 정작 나는

그 따듯하고 정감어린 할머니와 어머가지 좋아하는 음식이 무어냐고 물어온다면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그 얼굴과 함께 떠오르는 많은 음식이 있다

배추전과 연근전이 있고  타래과와 수제 도넛이 있고 겨울날 웃풍으로 코끝은 시려도 지글지글 끓는 구들장덕분에 뜨끈해진 엉덩이를 느끼며 넘기는 팥죽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도 그 음식을 좋아했을까?

김치 꽁지를 먹고 콩나물 대가리만 남은 찬거릇을 긁어 먹거나 밥알과 고축가루가 둥둥 떠오르는 밥그릇에 그냥 커피랑 프림이랑 설탕을 적당히 섞어 지금으로치면 믹스커피를 타서 마시던 모습이 떠오를 뿐이다. 이쁜 그릇에 정성껏 담은 음식은 당신 차례가 아니었고 남아서 버리면 죄받을지도 모를 죄책감에 남김없이 먹어치우던 음식들 그리고 설겆이 거리를 하나라도 줄이기 위해 그냥 먹던 그릇에 타서 사치스럽게 마셔보던 커피까지... 그걸 정말 좋아했을 리 없다.

세상 어떤 정의도 용기도  정치도 먹지 않고 이루어 질 수 없다.

먹어야 삶이 이어지고 살아야 정의도 용기도 민주도 투쟁도 가능했다.

그렇다면 누군가 그러게 드러내기 좋아하는 추상명사를 추구하는 동안 또 누군가는그들의 입에 들어갈 구체적인 명사들을 다듬고 삶고 끓이며 음식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고 아무곳에도 기록되지 않는다.

그리고 동시에 그게 당연하고 그게 살아가는 이치라고 힘을 가진 자들은 정의를 내리고 그렇게 규칙을 만든다.

먹는 일 먹이는 일 만들어 내는 일... 모든 일이 정치적일 수 밖에 없다.

다만 누군가 편리하게 만들어 놓은 당연함 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앗을 뿐이다.

거기 그들이 있고 우리가 있고 내가 있었다.

 

평범한 일상에 스며드는 가장 익숙한 권력에 대해 생각한다.

세상에서 당연하다며 만들어 낸 개념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보지 못했던 사람들을 생각한다. 본다.

그리고 나도 누군가의 눈에 띄기를 바란다.

내 가족이 나를 맛과 냄새로 기억하는 것도 괜찮다.

그렇게 익숙하고 좋아하는 맛을 만들엇던 내가 누구인지도 관심을 함께 가지길 바란다.

그 뿐이다.

그건 단순하지만 어렵다. 늘 노력하고 애쓰지 않으면 쉽게 잊히고 쉽게 없는 존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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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페미니스트는 없다 - 완벽한 페미니즘이라는 환상
이라영 지음 / 동녘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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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진짜를 지향하지 않는다 "진짜'가 되려는 윤리적 욕망은 때로 타인을 폭력적으로 규정짓고 배척하며 제압할  위험이 있다. "진짜"를 정의하고 선택하는 권력에 대해 의구심이 있다 진짜 여성 진짜 페미니스트 여성이 있어야 할 진짜 자리 진정한 여성의 삶을 알려주려는 사람들의 충고는 나는 사양한다. "진짜'는 모르겠으나 내 삶과  길, 나의 자리, 나의 역할, 나의 욕망, 나의 사랑은 각각의 '나'들이 찾아야 한다. 이 '나'들은 문화와 관습이 정해주는 자리가 아닌 충분히 다른 세계를 갈망할 권리가 있다

남성적'나;들이 보편적인 인간을 대표하는 세계에서 묵살당한'나'들의 재현과 목소리는 정치적 행위다. '나는' 으로 시작하는 말하기를 상대적으로 차단당한 존재들이'나는'으로 시작하는 말하기를  확장하길 갈망한다. 자신의 쾌/불쾌가 사회적 옳음 /그름과 일치해온 사람일수록 제 기분에 의지해 사안을 판단한다 여자들이 감정적이라고? 여자의 감정이 사회가 정해놓은 규범과 자리를 벗어나면 부정적인 의미로 감정적이라는 오명을 덧씌운다. 여자의 감정은 정치화 되지 못하고 해석당한다.여성의 연대와 목소리를정치행위로 보지 않는 게 문제다 기존의 가부장-여성착취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진보'는 '반동'을 적극적으로 행하는 모순을 저지른다. 정치와 폭력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여성들은 기존에 폭력으로 규정되지 않았던 문제를 폭력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다른 방식으로 정치 행위를 하며 연대를 보여주고 있다.

                                                            p10 <들어가는 말: 보편의 제구성>

 

 

 

칭찬은 일종의 권력관계를 정리하는 방식이다.나는 너에게 칭찬을 '줄 수 '있는 사람이며 너는 나에게 칭찬을 '받는'사람이라는 관계가 성립된다 어린이는 어른에게 칭찬하지 않는다. 칭찬은 아랫사람을 인정하는 행위로 구축되는 경우가 많다. 부모의 칭찬을 받으려는 아이. 주인의 칭찬을 받으려는 반려견, 선생님의 칭찬을 들으려는 칭찬은 아랫사람이 갈구하는 당근의 역할을 한다. 뒷사람은 칭찬을 통해 계속 내 마음에 들게 행동하라는 압력을 넣는다. 그래서 마음에 들지 않으면 '평소에 좋게 봤는데'와 같은 말을 덧붙여 비난한다.

칭찬은 평가의 다른 방식이다

                                                p26 < '진짜'는 없다> 

 

 

 

'진짜' 페미니스트를 강조하지만 때로'진짜'페미니스트는 페미니스트를 비난하는 언어다. 넌 늘 화가 나 있는 '진짜'페미니스트 같지 않아. 라고 말하는 것이다.불편하지 않은 페미니스트를 선호하는 이들은 사회 개혁보다는 페미니스트 재교육에 관심이 많다.페미니스트 감별사가 되어 페미니스트를 얌전하게 길들이려 한다. 태도에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는 내용을 무시할 수 있어서다. 나에게공손하기만 하다면 너의 말을 들어주겠다는 뜻이 아니라 너의 말을 교양있게 무시할 수 있다는 뜻이다.

                                              p28 <진짜는 없다> 

 

진짜(좋은)와 가짜(나쁜)에 대한 구별은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작동한다. 이는 순수와 비순수 곧 순수와 오염이라는 이미지를 만들며 그것은 '우리'와 '타자'를 구별하는 기준이 된다'참된'민족과 '참된' 문화와 '참된' 공동체 그리고 폄하하고 공격해도 문제되지 않는 '참되지 않은'타자들이라는 대립구도를 구축하는 전략을 나는 곰곰히 들여다 보았다. 순수, 진짜 참됨을 향한 숭배는 극우의 정신에서뿐 아니라 많은 운동 진영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진짜인 우리와 극단주의자들이라는 저들을 만들어 저 타자들을 축출의 대상으로 삼는다. 진짜 페미니즘에 대한 점검은 꾸준히 헛수고가 될 것이다. 동시대 페미니즘은 꾸준히 남성혐오로 번역될 것이기 때문이다. 진성정은 죽어야 증명된다. 진정한 페미니스트란 자신의 현재를 방해하지 않는 페미니스트이다.

                                       p49 < 진짜는 없다>  

 

완벽한 진짜만 허락된다는 것은 다양한 경험과 충돌을 통한 성장을 억압한다는 뜻이다.

 

하나의 진짜 길만 있는 사회보다는 여러 종류의 다른 길이 있는 사회가 옳다. 물론 '잘못된' 길에 이르거나 위험한 길에 다다를 수 있으며 길을 더럽힐 수도 있다. 때로는 막다른 길에 이르러 다시 돌아와야 할 수도 있다 그렇게 수많은 오류와 실패를반복하며 길을 알아갈 권리가 있다.누구도 그 권리를 박탈할 수 없다. 실패를 쌓아 균형을 만들 권리가 있다. 실패조차 하지 못하면 영영 고립된다. 완벽하지 않아서 부정당할 필요는 없다.

                                                          p42

 

 

지금 여기에는 항상 더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들이 있다. 문제의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는 권력이 지배자다. 나중은 실체가 없다. 나중이라는 시간은 결국 영원히 나중이 된다. 그렇게 저항의 목소리는 지금 여기에서 점령당한다. 역사가 조금이라도 진보하는 순간은 나중으로 밀려나는 목소리를 바로 지금 여기에서 들리도록 만드는 그 순간이다. 지금이라는 시간과 여기라는 장소를 박탈당한 이들이 바로 사회의 약자다. 소수자들의 저항축제는 그래서 필요하다. 그 시간 그 장소에서 일시적 해방을 통해 목소리를 내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현재는 그토록 귀하며 여기의 안전은 언제나 불안하다. 지금 들리는 목소리. 지금보이는 몸짓을 막지 말아야 한다.재발견의 번거로움을 남기지 말고 지금 여기의 존재를 억압하지 않으며 그 목소리를 묵살시키지않는 것이 최선의 진보다. 우리는말하고 움직여야 한다.

                                   p52 

 

 

여성다움은 대부분 무시당해도 가만히 있는 성질이다. 이를 '다소곳한''참한' '청순한'  '얌전한'  '순한'   조용한' 등의 형용사가 대체 하고 있다. 성희롱앞에서도 여성들은 가해자를기분 나쁘지 않게 해야한다 여성들은 알게 모르게 남자를 기분 나쁘게 하지 않는 인간으로 길러졌다. 여성의 일상에서 '남자에 대한 무시;라고 규정되는상황은 셀 수 없이많다. 자기 생각을 말하면 '기가 세고 설치고 남자 알기를  우습게 아는 ' 여자가 된다. 가해자의 무시해서라는말은 많은 여성들에게 구체적인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다.여성의 행동에는 토를 넘는 이나. 지나친 이라는 말이 곧잘 붙어다닌다.그렇기에 공개적으로 권리를 주장하는 페미니스트는 툭하면 페미나치라는 소리를 듣는다. 페미나티는 저항의 언어를 뒤집어서 저항하는 자를 도리어 가해자로 만드는 대표적인 언어이다.진보정당의 계시판에서페미나티라는말이 여성들을 공격하기위해 등장해도  이는 사회적 문제가 되지 못했다. 다른 큰 일도 많은데 여자들이 너무 설치기 때문이다 저항은 조롱당하고 무시와 무지 속에서 목소리 자체가소거당하고 있는대도 올바른 목소리만 허락하겠다는 올바른 사람들의 진보는 대부분 여성의 삶과 무관한 진보다.

 

                                          p64 

 

존중 인간을 존중하는 태도는 당연히 지켜져야 하는 것인데 이 기본적인 태도가 당연하지 않다보니 여성을 존종할 줄만 알아도 특별한 남성이 된다. '남성다움'에 는 여성에 대한 지배가 포함되어 있기에 여성에 대한 남성의 존중은 종종 사회적으로 무시당한다. 남성은 여성을 존중하지 않도록 부추긴다. 아내를 존중하는 남성을 남자답지 못한 인간으로 보고 남성연대에서 탈락시키려 한다. 남성이여성을 존중하기 어렵고 또 존중의 개념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다.

 

 

걸레는 여성의 경험을 비하하는 대표적인 언어다.걸레는 낡고 냄새나는 더러움의 상징이다.걸레, 곧 경험있는 여자는더럽다는 낙인이 찍힌다. 처녀성에 대한 집착은 여성에 대한 소유욕 때문만은 아니다. 여성의 경험이 남성의 기능에 대해 잘 알고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포함되어 있다

                           p 71 <몸이된여성들> 

 

여성의 다양한표현과 다양한 모습의 재현은 기존의 체제를 위협한다. 여성을 단지 '자궁으로 여기는 것은  여성의 생각과 인격을 무시할 수 있는 흔한 방법이다. 돌아다니고 말하는 인간이 아니라  그냥 자궁~ 남성의 시각에서 자궁은 생각이 없을 때 가장 안전하다. 그곳은 힘들고 외로울 때 돌아갈 수 있는 장소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나를 가두는 공포로 탈바꿈 해 억압할 수 있다. '이빨 달린 질'은 오래된 신화다.

 

어머니= 대지 라는 공식에 따라 한국의 민중미술에서도 여성은 대지로 표현되었다. 대표적인 민중미술가 임옥상의 <대지의 어머니>는 가슴이 축 늘어진 나이든 여성이 상반신이 땅에서 올라온 모습이다. 땅과 여성이 한 몸이되어있다. 이 여성의 몸에서는 고단한 세월이 느껴진다.작가는 이 작품을 '위안부'피해 여성들의 쉼터인 '나눔의 집'에 기증했다. 이 작품을 본  '위안부'피해 여성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작가는 땅에서 솟아나는 생명력을 의도했으나 그들의 입장에서 나체의 상반신을 드러낸늙은 여자의 형상은 생명력이 아니라 과거의 기억을 불러들였다. 어머니= 대지= 생명력의 공식은 그 대지에 씨를 뿌리는 사람으로 감정 이입하는 사람의 시각일 뿐이며  대지와 동일시되는 사람의 시각은 아니다. 나의 땅은 생명력있는 대지이지만 남의 땅은 빼앗아야 할 장소가 되고 주인 없는 땅은 정복의 대상이 된다.

                                  p 91 

 

여학생 휴게실이나 여직원 휴게실이 있는 이유는 여성을 위한 특혜가 아니다.여성이나 성소수자가 보편적인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하기 때문에 보편적 장소를 이용하는데 불편함을 겪기 때문이다. 여성 전용 주차장은 여성 폭력을 방지하는 대인일뿐 특혜와는 전혀 무관하다 여성의 장소는 자꾸만 제약을 받고 침범 당한다. 화장실 몰카라는 성폭력은 바로 일상에서 일어나는 침략행위이다.남성은 여성의 몸(공간)을 침범해그공간을 채우고 장소를 점령하려 한다. 그래서전쟁은 반드시 강간을 동반한다.

                         p123 

 

 

근대 도시는 공공장소와 집을 공과 사의 영역으로 구별했다.정숙한 여성들은 사적인 집 안에 있어야 했고 남성들은 거리와 바에서 시선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다. 밤에 거리를 걷는 독신 여성은 성매매 여성으로 오해받을 각오를 해야 했다.여성이 체면을 유지한다는 것은 공공장소에 함부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편안할 안은집에 있는 여성이 안전하다는 뜻이 아니다 집에 여자가 있어야 남자가 편하다는 의미다.

                                    p 143

 

 

여성은 집사람이다. 집은 돌아다니지 않는다.과거의 쓰개치마, 전족, 남자를 동반하지 않는 해외여행 금지 등에는  모두 이런 배경이 깔려 있다. 일부 나라에서 부르카는 현재 진행형이다. 그런데 집은 과연 여성에게 안전한가 밖에서 여성이 보이지 않길 바라는 사회일수록 여성에게 집이란 공간은 많은 차별과 폭력을 은폐하는 장소가 된다.

 

                         p 208 <같은 공간 다른 자리>  

 

 

이주는 제 주변을 구성하는 인간관계와 환경, 기후, 음식, 때에 따라 언어까지 바뀌는 일상의 자각 대변동을 몰고 온다. 상실로 채워지는 이주는 한편으로 개인의 정체성을 꾸준히 되묻는다. 인간의 정체성은 고정불변이 아니다. 스튜어트 홀의 주장대로 특정한 역사  곧 장소와시대속에서 자리매김되어  형성된다

특히 여성에게 이주는 인정과 젠더의 정체성을 둘러싼 질문의 무게를 가중시킨다. 나의 젠더와 국적을 지속적으로  환기시키는 환경은 나의 기원에 나를 꾸준히 묶으려 한다

 

 

 

부모가 그러면 안되지 않아?

엄마가 그러면 안되는거지. 친엄마라면 그러지 않았을거야. 자격이 없지

무슨 엄마가 그래?

여자가  그러는  거 말이 안되지.

그래도 여잔데 그건 아니지 않아?

말이?

행동이?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것이 있고 그 이유로 마땅히 그러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자꾸 생겨난다.

뭔지 모르지만 기대하고 있는 기준에 맞지 않다는 말이겠지

상식이고 보편이라고  기대하는 것들을 뒤집어 보면 그건 누군가에게는 폭력이고 편견일 수도 있다고 하지만 그런 문제는 차처하고 가장 궁금한 것은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는 기준은 언제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라는 거다.

누군가가 누군가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만든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것들'은 누군가를 자유롭게 하는 조항이며 동시에 '누군가'가 아닌 ' 또 다른 누군가'의 불편과 차별을 바탕으로 하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는 명제는 옳을까 그를까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보이는 풍경이 다르다는 건 계급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성별의 문제이고  취향의 문제이며 내게 기대되는 역할의 문제도 다 포함하고 있다.

다수의 편의를 위한 마땅함들은 누군가 보이지 않는 이들의 희생과 무시  투명인간처럼 보이지 않는 존재를 두고 있지 않을까? 그들은 주로 소수자일 것이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일

세상이 기대한다고 말하는 진짜는 누가 정해놓았을까?

고백하자면  그렇게 누군가가  누군가 (분명 전체를 위한다고 믿으면서도  일부만 편한) 를 위해 만들었다는 규칙에 맡기는 일은 참 편리하기도 하지

내게 거슬리는 건 그건 상식이 아니라고  맞지 않는 일이라고 탓해버리면 되거든

왜 그러느냐고 한다면  원래 그런 거잖아. 라는 말이면 누구든 입을 닫게할 수 있거든

 

학생답지 않잖아.

그것도 여학생이 그렇게 앉으면 안되지.그렇게 말하면 안되지.남들이 어떻게  보겠니?

그 말을 뒤집으면 너가 그렇게 하는 게 나는 거슬리고 너의 거슬리는 행동으로 내가  욕 먹는건 딱 싫다. 이런거

나랑 상관없는 사람이라면그냥 욕하거나 모른 척 하면서  적당히 무시할테고

나랑 상관있는 사람이라면  너를  위한 말이야라고 하면서 위하는 척  생각해주는 척 하며 니가 몹시 거슬리고 마음에 들지 않아.하는 마음을 감추기 딱 좋은  세상의 기준들

 

진짜 감별사들은 세상에 너무 많아

점점 세분화 됨면서 개인 자격이라도 있는것 처럼 진짜 다운 걸 가려내는  사람들

자식답게

학생답게

신입직원답게

아르바이트답게

후배답게

주로 이렇게 엄격한 기준은 나보다  약하고 만만한 사람에게 향하기 마련이고

간혹 위를 향하는  기준은 그들의 꽉 막힘이  꼰대같은 행위들을 이해해주라는듯  마땅하다는 걸 말하는 기준으로 쓰이곤 하지  (물론 모두가 그렇진않지만...)

 

페미니즘을 알든 모르든  누구나 조심스럽게

"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

"내가 꼭 페미니즘을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덧붙여 의견을 말하는 것이 예의고 동시에 자기를 보호하는 막이 되어주리라 믿는다.

차별은 싫고  삶에서 여러가지 억울한 일들을 경험하면서도 그래도  튀고 싶지 않은 마음

누군가에게 말을 듣고 싶지 않은 마음들이

결국  누군가 타인에게 기준을 맡기게 되는 상황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믿고 있더라도  그래도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그렇게 행동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이렇게 입을 다물고있어도 될까   예쁘게 화장하고 샬라라 옷을 입고 누군가에게 얘교있고 사랑스러워 보이고 싶고 적당히 보호 받고 싶고 모른 척 하고싶은 마음을 가져도 될까?

누가 하는 말처럼  내가 필요할때 필요한 카드를 적당히 뽑아 쓰고 사는  게  아닐까

그렇게 자꾸 나를 평가하고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당당하고 솔직한 타인이 나랑 상관없을 땐 멋지다고 하면서

내 가까운 곳에서 그렇게 나랑 비교될것 처럼  보이면 그냥 이유없이 미워지고 너무 나대고 설친다고 생각하는 것  그래서 밉상이라고 생각하는 마음

 

 

 

 

터무니 없이 화가 나는 부분은  주로 이런 것이다.

내가 살면서 너무 불공정하다고 느끼는 점이 지금 이 시간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

그땐 사람들이 좀 무지했고 생각이 짧았고 너무 오랫 관습때문에 잘못이 잘못인지도 모르고 살았다고 하지만 지금처럼 모든 정보가 홍수처럼 쏟아지고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어떤 정보에도 접근이 가능하며 한 사람의 생각이 이렇게 빠르게 의도와는 상관없이도 전파되는 세상에서 그리고 누구나 자기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어쩌면 시끄럽고 정신없고 혼란스러운 이 시대에

여전히 누군가는 불공정함과 공포와 내가 책임 질 수도 없고 질 필요도 없는 수치심과 죄책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 그것이 여전하다는 것이다. 다만 그  형태는 조금씩 진보하고 변할 뿐이다.

그저 치한이나 변태들이 어두운 골목을 돌아다니던 시절에서 이제는 내가  당연히 이용해야하는 공공시절에서 누군가가 나를 지켜볼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가지고 지울수도 없고 쉬지도 않는 사이버 공간이라는 곳에서 나는 영원히 누군가에게 노출될 수도 있다는 것

공포의 불안은 진화하는데

그에 대해 책임지는 사람은 여전히 없다.

차라리 그 시절의 변태나 치한이 귀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세상이 이렇게 여전할 줄 알았다면 이렇게 더 치밀하게 치사해질 줄 알았다면 후손을 남기지 말고 그냥 삶의 흔적도 남기지 말고 사라지는 것을 택했어야 헸는데...

조심하며 살아온 내 시간만큼 내 아이들도 조심해야 하고 더 조심해야 할 목록이 늘어나고 있다면 이건 도데체 뭐라고 해야할까?

 

 너는 진짜냐? 고 묻는 이에게 나도 묻고 싶다.

니가 생각하는 진짜는 도데체 뭐지?

그 진짜가 진짜로 진짜라고 믿는 너는 진짜니?

이 무슨 말장난같은.....

 

이제 무얼 읽어도 시원해지는 건 점점 줄어든다.

세상은 점점 엉망이고 막장을 향해 달려가는 아침 드라마같고

그러에도 희망을 가지고 살지 않으면 안되는  그렇지 않으면 개인적인 나의 무능일 수 밖에 없는

마음이 아프고 먹먹한 이야기에서 그래도 실날같은 무언가를 잡아야 하는데

그냥 사는게 두렵고 이런 세상에서 살아보라고  아이들을 채근하는 내가 무섭고

그렇게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 아이들에게도 미안하고

뭐.... 복잡한 마음 뿐이다.

 

올 여름이 너무 덥지도 않았는데

이제 갱년기에 접어들어서일까?

무얼 읽어도 다 깝깝하고 쉬이 지친다.

이건 책의 문제오 아니고 날씨의 문제도 아니고 그저 아직도 막막한 이 세상의 문제 8할에 개인적인 호르몬의 문제가 2할인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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