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밀키웨이 > 그의 법명은 '현소심(玄素心)'이었다


    


 

김형경씨의 소설에 대한 기억을 따라 올라가면 군 생활의 막바지,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의 겨울이 딸려 나온다. 강원도의 추위는 매서웠다. 떨어지는 낙엽도 피해야 할 만큼 조심스러운 말년 병장의 시절. 하루하루의 시간은 너무나 길었고 지루했다. 그 시절에 뜻하지 않게 만난 것이 바로 장편 「세월」이었다.
매케한 석탄 가스를 뿜어대는 페치카 옆에 웅크리고 앉아 「세월」을 읽었다. 분명 활자에 그리고 이야기에 목말랐을 게다. 그렇게 김형경이란 이름은 나와 첫 대면을 나눴고, 수년을 뛰어넘어 지난 토요일 사진으로만 바라봤던 그와 직접 마주할 수 있었다. 그 사이에는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이 놓여 있었다.

1000매의 정신분석, 모험을 감행하다


"이번 소설은 막바지 작업이 다급하게 진행된 탓도 있겠지만 글쓰는 일이 직업이다보니 매번 새작품을 내놓을 때마다 설레거나 특별한 소감을 갖게되지는 않아요."
3년만에 전작 장편을 내놓은 작가의 첫마디치고는 정말 싱겁기 짝이 없다. 그렇다고 아예 할 말이 없었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2,600매 중에서 1,000매 가량을 주인공의 정신분석치료 장면으로 채웠는데, 일종의 모험이었죠. 그 과정을 읽어가면서 독자들도 자신들이 안고 있는 심리적인 장애나 어려움을 함께 해소할 수 있기를 바랬으니까요."
1,000매의 정신분석치료 장면의 주인공은 바로 '세진'이다. 세진의 직업은 건축가. 건축사무실의 밑바닥에서 시작해 당당한 전문 직업인으로 대접받는 성공한 30대의 여성이다. 매사에 빈틈이 없어 보이고 묘한 보호본능을 불러일으키는 세진은 이성적이고 당당한 겉 모양새와는 달리 내면에 복잡한 상처와 아픔을 숨겨둔 그런 여성이다.
세진에게는 일종의 분신과도 같은 친구가 하나 있었다. 그의 이름은 '인혜'. 학창시절 함께 자취를 했을만큼 가까웠던 사이였지만 세진의 마음이 견고하게 닫혀 있던 탓에 어쩔 수 없이 각자의 길로 떠나야 했던 그런 친구다.
그렇게 십년간의 떠도는 풍문에 의지해 서로의 안부를 듣던 두 친구는 '오늘의 여성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준말인 '오여사'라는 모임의 결성식에서 다시 재회하게 된다. 그 즈음 세진은 심한 정신적 장애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신과 치료를 택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내면에 억눌려 있던 어두운 과거와 고통스러운 만남을 갖게 된다.
부모님의 이혼과 버려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사랑의 결핍과 성폭행, 그 때문에 자라난 이성적이고 강력한 자기 방어 의식들. 그 견고한 틀을 조금씩 깨고 나온 세진은 이제까지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었던 허울을 벗어버리고 '야하고 뻔뻔스러운' 모습으로 살아갈 것을 결심하고 여행길에 오른다.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은 인혜도 마찬가지. 세진과의 이별 후 한 남자를 만나 결혼까지 감행했지만 남자의 성 불능에서 오는 폭력과 음주를 견디지 못해 이혼하고 말았던 것. 그 대신 인혜에게 남은 사랑이란 삶을 생기 있고 역동적이게 하는 일종의 게임이라는 생각뿐이었다.
인혜의 이런 의식은 진웅과의 만남을 통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고, 성적 장애를 가진 진웅에게서 연민의 정을 느끼면서 그가 가진 사랑에 대한 순수함과 열정에 새롭게 동화되기 시작한다.

    



'성'의 코드로 정체성을 찾아간다

 "성은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가장 본질적인 코드라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성 불능은 곧 억눌린 무의식이 존재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결국 억눌린 무의식은 분열된 자아로 나타나고 짐짓 욕망하고 있으면서도 그렇지 않은 척 자신을 기만하고 만다. 욕망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결핍의 문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인 사랑의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상처와 갈등을 만들어 내고 결국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상실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주인공인 세진과 인혜가 과거의 껍질을 벗어던지고 그 안에 억눌려 있던 자아를 마침내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새롭게 태어나는 과정은 억눌렸던 욕망의 이면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과정인 동시에 그동안 잊어왔던 자신의 정체성을 비로소 찾아가는 과정이었던 셈이다.
"동전의 양면은 서로에게 어떤 위협이나 억압을 가하지 않으면서도 함께 존재하고 있잖아요. 표면적으로는 여성의 정체성과 사랑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결론적으로는 그 모두를 포용하는 보다 큰 인간의 문제로 다가서고 있는 셈이지요."
이제 제목이 담고 있는 '기준'이 무엇인지 비로소 드러난 셈이다. 자신에게 결핍되어 있는 그 무엇, 내면에 엄연히 도사리고 있지만 결코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동전의 양면처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
사랑을 갈구하는 대상이 그것을 가지고 있는가 혹은 그것을 만족시킬 수 있는가의 문제가 바로 선택을 결정하는 '특별한 기준'으로 우리 안에서 작용하고 있다는 말이다. 또 그 작용이 원활할 때 비로소 결핍의 충족과 함께 정체성에 대한 완결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 이제야 비로소 '나를 숙일 수 있는 마음으로 종교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는 김형경씨는 자신의 법명이 '현소심(玄素心)'이라고 귀뜸한다. 한자의 뜻 그대로를 옮겨 보면 '검고 흰 마음'이 된다. 하나의 마음 안에 검고 흰 두 가지 속성이 함께 존재하고 있다는 의미다. 결국 삶이라는 것은 이렇게 상반된 양면성을 고스란히 인정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성찰을 이어가는 과정의 연속이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그와 작별하고 돌아서는 순간 불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언뜻 낯설지만 익숙한 얼굴 하나가 스쳐지나간다. 짐짓 모른척 발길을 돌려보지만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다. 영하의 체감온도를 기록한 비오는 오늘. 그 낯설고 익숙한 얼굴의 또 다른 '나'는 어느 동네 어느 거리를 헤매고 있을까. 1,000매의 처방전을 읽고 난 지금도 그 낯설음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은 내 안의 억눌린 욕망이 여전히 건재하기 때문일까?

 

- 웹진 부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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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밀키웨이 > 그림은 내 영혼을 만나기 위한 순례 - 김점선

대학을 졸업하고, 나 자신의 의지로 살아야 하는 때가 되었을 때, 나는 죽음 밖에는 떠오르는 말이 없는, 낙오자가 되어 있었다. 머릿속에는 잡념과 잡지식 만이 썩은 지푸라기처럼 쑤셔 박혀 있는 아웃사이더가 되어 있었다.
학교 다니는 일 외에는, 아무 준비가 안된 미숙아인 채로 졸업을 당했다. 나는 그런 자신을 숨기기 위해서 공부를 더 해야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외쳐댔다. 그리고 대학원에 입학했다. 아버지가 한숨을 쉬면서 등록금을 줬다. 그렇게 큰소리 치고 들어간 대학원에서 한 학기만에 제적당했다. 맘에 안 드는 과목을 수강 거부했기 때문이다. 대학원에서 나를 가르치던 미국인 선생님이 나의 제적을 안타까와하면서 동료와 일할 기회를 주었다. 통역 일을 했다. 행복하지 않았다. 돈을 많이 받았지만 모으지 않았다. 다시 죽음과 마주섰다. 나의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 때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림! 그림을 시작했다. 하루종일 그렸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림 그리는 일뿐인 것처럼 그렇게 살았다. 행복했다. 제대로 된 길을 찾은 기쁨을 느꼈다. 다시 회화 전공으로 대학원에 입학했다. 그때 내 나이는 27살이고 지금부터 31년 전 일이다. 아버지는 나를 금치산자 취급을 했다. 누가 봐도 그렇게 생각할 만큼, 나는 헝클어진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럴 때 엄마가 나섰다. 무조건 나를 지원했다. 열심히 그림 그리고 학교 다니는데 그것만으로는 예술가가 안 된다고 했다. 결혼을 해서 인생의 쓴맛을 이겨내고 나서야 진정한 예술가가 된다고 했다. 맞는 소리 같아서 결혼했다. 집 나온 청년과 이름도 나이도 묻지 않은 채 결혼했다.

주변 사람들은 그런 나의 행동에 경악했다. 아이도 생겼다. 매우 가난했다. 우리가 굶는다고 해도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내가 일부러 굶는 줄 알았다. 재미나 멋으로. 그럴 때 사는 길은 극도로 아끼는 것이다. 어쩌다 5만원 주고 그림 한 점을 팔면 정부미만 사고 반찬 사는 데는 돈을 한푼도 안 썼다. 동네에서 얻은 된장에 산에서 캐온 풀은 넣고 끓여서 먹었다. 그림 그릴 캔버스도 돈을 아끼려고 광목을 사다가 합판에 붙여서 그렸다.

그런 그림을 모아서 개인전을 열었다. 그림이 꽤 팔렸다. 일년 먹을 쌀을 사고 물감과 광목을 살만할 돈이 생겼다. 작업실이 따로 있을 리가 없다. 지붕에서 물이 새는 좁은 셋방에서 살았다. 그 시절에 그린 그림은 제일 큰 게 30호를 넘지 않는다. 100호 짜리 캔버스에 그림 그리는 게 꿈이었다. 비만 오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고인 물을 버리느라고 밤을 새야 했다, 그럴 때 멍히 물을 바라보느니 그림 그리면서 밤을 샜다. 내가 살던 마을의 산과 들에 대해서 환하다. 어디에 무슨 나물이 있는지 언제 어떤 먹을 만한 풀이 나는지를. 그 마을에서 산을 식량창고로 생각하는 사람은 나 뿐이었다. 그림 그리다가도 하루에 한시간 쯤 은 산을 헤메면서 반찬감을 구해야 했다. 그렇게 살면서도 해마다 거르지 않고 개인전을 열었다. 그리고 꼭 일년을 버틸 만큼씩의 돈을 벌었다. 내 행동은 변함이 없는데 차츰 그림이 더 많이 팔리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100호 캔버스를 100개나 살 수 있게 되었다.

나는 해마다 전시회를 연다. 전시회는 내가 먹고살 돈을 버는 길이면서 또한 그림을 보여주는 기회이다. 그림은 경건한 예배다. 자신의 영혼을 만나기 위한 순례다. 내 영혼은 하늘이 내게 내린 숙제다. 평생 풀어나가야 할 대상이다. 내 영혼 속에는 가깝게는 나와 나의 부모의 경험이 축적되어 있다. 멀리는 구석기시대의 내 조상의 경험까지도 흔적으로 남아있다. 나는 내 영혼의 시각화에 몰두한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만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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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밀키웨이 > 세계 아동문학의 거장 버닝햄과 뇌스틀링거


"아이가 말로 못하는 것 표현하게 돕고 싶어"

[조선일보 김윤덕 기자] 설령 당신이 아이를 키우지 않는다 해도 존 버닝햄과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의 작품을 단 한편이라도 읽게 된다면 아이들의 세계가 얼마나 진지하고 외로운지, 이를 탐구하는 동화가 문학의 얼마나 중요한 장르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두사람의 그림책들을 읽으며 전세계 아이들은 열광한다. 한국을 비롯한 전세계의 버닝햄 매니아들은 그가 발표한 50여권의 그림책을 책장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끌어안고 살고, 뇌스틀링거의 ‘프란츠 시리즈’는 유럽 아이들에게 ‘해리 포터’ 이상의 사랑을 받는다.

1936년생 동갑내기이기도 한 이들은 단순한 이야기꾼이 아니다. “어른과 동일한 권리를 지닌 어린이는 명령의 수용자가 아니라 대화의 파트너’라고 규정하는 뇌스틀링거, “아이들이 어른들보다 덜 지적인 것은 아니다. 경험이 부족할 뿐”이라고 단언한 버닝햄은 동화에 대한 낭만적이고도 상투적인 시각―어린이를 교훈과 계몽의 대상으로 삼는 태도―을 혁명적으로 뒤집어놓았다. 그들을 각각 유럽 현지에서 만났다.

# 나의 정신 연령은 다섯 살

런던 외곽 햄스테드 히스의 자택에서 만난 버닝햄은 오래돼 삐걱거리는 마루를 꾸부정한 걸음으로 오가며 직접 홍차를 끓여왔다. “걸음걸이가 존 패트릭 맥헤너시(그의 대표작 ‘지각대장 존’의 주인공)를 닮았다”고 농을 걸자, 그는 “나는 시간을 잘 지키는 아이였다”고 답했다. 열 군데 이상 학교를 옮겨다니다 결국은 썸머힐 스쿨(영국의 대표적인 대안학교)에 안착했던 괴짜소년. 공부보다는 숲과 동물에 미쳐 있던 버닝햄은 “2차 대전으로 1년간 학교에 안다녔을 때가 내겐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회고했다.

―존, 셜리 등 당신의 어린 주인공들이 소심하고 다분히 냉소적인 것은 당신의 특별한 유년기와 관련 있는 듯하다.

“썸머힐 시절은 축복이었다. 수업을 억지로 들을 필요가 없었으므로 대부분의 시간을 미술실에서 빈둥거리며 보냈다. 자유로운 어린시절을 보냈다는 것은 그림책을 만들 수 있는 최고의 바탕이다.”

―교통 포스터 디자인 등 갖은 일들을 전전하다 1963년 데뷔작 ‘깃털없는 새 보르카’로 영국의 권위 있는 ‘케이트 그린어웨이 상’을 수상했다. 그림책 작가가 되려던 동기는 무엇이었나.

“그건 나의 정신연령(mental age)과 관계 있다. 사람들이 내게 몇살이냐고 물으면 나는 다섯 살이라고 답한다. 당신도 동화작가로 성공하려면 그 또래 아이들의 언어, 특히 농담을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웃음)”

―거칠게 그어댄 펜 선, 크레용부터 사진 콜라주에 이르기까지 활용한 풍부한 표현은 아이들을 매혹시킨다.

“어느 한가지 재료에 구속받으면 상상력도 무너지고 그림도 망가진다. 머리속에 완벽한 이야기가 구성되지 않으면 1년이 걸리더라도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당신의 삶과 작품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이 있는가.

“10대 후반, 군대에 가지 않으려고 ‘프렌즈 앰뷸런스 유니트’라는 단체에 들어가 2년6개월간 숲과 슬럼가, 이태리 남부와 이스라엘을 떠돌며 막노동했던 적이 있다. 그때 만난 사람들, 들었던 이야기들은 나의 작업에 가장 큰 밑천이다.”

―그림책 ‘곰사냥을 떠나자’를 그린 헬렌 옥슨버리가 당신의 아내다. 유명한 부부 그림책 작가는 자녀들을 어떻게 키우는지 궁금하다.

“평범하게, 아니 무심하게 키웠다. 어느날 정신차려보니 죄다 그림을 그려대고 있었다.”(버닝햄의 세 남매 루시, 빌, 에밀리는 모두 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적어도 휴일과 사치품은 아니다.”

# 너의 어린시절을 미화하지 말라

오스트리아 작가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를 만난 곳은 독일 프랑크프루트 시내의 한 성당이었다. 돋보기 안경에 보풀이 살짝 인 주황색 가디건을 걸친 채 그는 성당 복도에 모여든 70여 명의 아이들에게 자신의 동화를 읽어주고 있었다. 낭독이 끝난 뒤 질문을 받았다. “당신의 가장 유명한 책은 뭔가요?” 한 사내아이의 이 대책없는 물음에 뇌스틀링거가 심각한 표정으로 응대했다. “아주 철학적인 질문이군!”

―아동문학가에게 주는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안데르센상에 이어 최근 6억원의 상금이 걸린 린드그렌 문학상을 첫수상했다.

“상이 좋은 건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와 내 작품에 대한 비평은 대부분 과장된 것이다.”

―사람들은 당신을 ‘제2의 아스트리드 린드그렌(말괄량이 삐삐의 저자)’이라고 부른다.

“둘다 언어를 중시한다는 점은 같다. 그러나 나는 린드그렌처럼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묘사하거나 아이들을 위로하려고 동화를 쓰진 않는다. 동화를 통해 세상에 대한 환상을 깨고 싶다.”

―시계공 아버지와 빈의 변두리에서 보낸 유년기는 작품에 어떤 영향을 줬는가.

“어린 시절의 추억은 대부분 잘못된 것들이다. 나는 과거의 기억을 소재삼아 글 쓰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유년기 영향이라면 나치와 2차 세계대전을 겪었다는 사실뿐이고, 그것으로써 세상 보는


눈을 갖게 됐다.”

―‘불처럼 빨간 머리 프리데리케’를 비롯한 초창기 작품들이 사회비판적·반교육적 관점을 강하게 표출하고 있다면, 프란츠 시리즈 이후의 것들은 아이들의 사소한 일상을 파고든다.

“70년대만 해도 나는 문학이 세상을 개선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문학은 독자들을 웃고 울릴 뿐, 세상을 바꿔놓지는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이들의 현실에 대한 통찰력을 높여주고 그들이 느끼는 불안감, 경험했지만 말로써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표현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뿐이다.”

―아이를 키우는 젊은 부모들에게 조언해달라.

“나는 기본적으로 교육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것에 반대한다. 어른들의 꾸중과 칭찬을 통해 아이들은 깨닫지 않는다. 경험과 고통을 통해 스스로 배우고 자란다.”

 

 

- 조선일보 2003년 11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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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밀키웨이 > 미하엘 엔데

 

미하엘 엔데. Michael Ende. 1929 ~ 1995

http://bookian.yes24.com/20020415/img/review/obd02.jpg

홈페이지:

약력

남부 독일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에서 초현실주의 화가인 에드가 엔데와 역시 화가인 루이제 바르톨로메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나치 정부로부터 예술 활동 금지 처분을 받아 가족 모두가 어려움을 겪었지만, 부모의 예술가적 기질은 엔데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글, 그림, 연극 활동 등 다양한 영역을 넘나드는 엔데의 예술가적 재능은 그림뿐만 아니라 철학, 종교학, 연금술, 신화에도 두루 정통했던 아버지의 영향이 특히 컸다.

이차 세계 대전 즈음, 발도르프 학교에서 수학하다 아버지에게 징집 영장이 발부되자 학업을 그만두고 가족과 함께 나치의 눈을 피해 도망했다. 전후 뮌헨의 오토 팔켄베르크 드라마 학교에서 잠깐 공부를 더 하고서는 곧바로 진짜 인생이 있는 세상 속으로 뛰어들어, 연극 배우, 연극 평론가, 연극 기획자로 활동했다.

1960년에 첫 작품 <기관차 대여행 Jim Knopf und Lukas der Lokomotivefhrer>을 출간하고 "독일 청소년 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을 걷게 된다. 1970년엔 <모모 Momo>를, 1979년엔 <끝없는 이야기 Der unendliche Geschichte>를 출간함으로써, 세계 문학계와 청소년들 사이에서 엔데라는 이름을 확실히 각인시킨다.

엔데는 이 두 소설에서 인간과 생태 파국을 초래하는 현대 문명 사회의 숙명적인 허점을 비판하고, 우리 마음 속에 소중히 살아 있는 세계, 기적과 신비와 온기로 가득 찬 또 하나의 세계로 데려간다. 1995년, 예순다섯에 위암으로 눈을 감았다.

번역된 작품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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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밀키웨이 > 상상력 충만 - 데이빗 와이즈너

 


<이상한 화요일>, <구름 공항>, <아기 돼지 세 마리>를 차례로 읽고 나서 맨 먼저 떠오른 생각은 도대체 어떻게 이런 그림책을 그릴 생각을 했을까 하는 것이었고, 한참 후에 다시 든 생각은 그는 어떤 사람일까 하는, 작가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그래서 데이비드 와이즈너(David Wiesner)를 이 달의 작가로 정하고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1956년 2월, 미국 뉴저지에서 조지와 와이즈너(George Wiesner)와 줄리아 와이즈너(Julia Wiesner)의 다섯 번째 아이가 된 데이비드! 그의 어린 시절부터 대학을 마칠 때까지의 생애를 살펴 보다 보면, 예정된 그림책 작가로의 길을 차근차근 밟아 나간 ‘창작 과정 연습기’라는 말이 꼭 맞는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데이비드 그림의 시작은 공룡이었다. 유치원에 다니는 남자애들이 흔히 그렇듯 데이비드 역시 공룡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그런 아이여서 친구들과 뒤뜰에서 공룡을 사냥하는 놀이를 즐겼다. 원시인들이 사냥에 성공하기 위해 동굴 벽에 사냥감을 최대한 실물에 가깝게 그렸던 것처럼 그 역시 자기 사냥감인 공룡을 가능한 한 실재에 가깝게 그리기 위해, 방안에 공룡 책이란 책은 몽땅 널어놓고는 몇 번이고 공룡을 그렸다 지웠다 하는 일을 되풀이하며 시간을 보내기 일수였다.



한 살, 두 살, 나이가 들면서 공룡에 대한 열정은 사라져 갔지만 그렇다고 데이비드에게서 그림에 대한 열정마저 사라진 건 아니었다. 공룡 대신 그를 사로잡은 건 뉴저지 공공 도서관에 있는 <타임 북(Time Book)>이라는 예술사 책 시리즈였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나타나는 듀러, 미켈란젤로, 다 빈치 같은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들, 브뤼겔, 달리 등 이후 시대 화가들, 초현실주의 화가들에 이르는 예술가들의 명화에 흠뻑 빠져들었다. 이 명화들에서 특히 와이즈너의 눈길을 끈 건 그림 속에 나타난 풍경들이었다. 그는 몇 시간이고 도서관 의자에 앉아 공룡을 그렸을 때처럼 그림을 따라 그리는 일에 정신을 집중하곤 했다.

캔버스 위에 옮겨진 그림 하나하나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 몇 개의 그림들을 늘어놓으면 시작과 끝이 있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그림들을 영사기에 옮겨 그 변화를 살펴보는 일은 데이비드에게는 무엇보다도 재미있는 놀이였다.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 고등학교 2학년 때는 친구들과 함께 박쥐가 나오는 무성영화를 만드는 걸로 이어진다.

<이상한 화요일>이나 <훨훨 날아라(Free Fall)> 같은 그의 대표작들에 나오는 그림들 하나 하나가 마치 영화나 애니메이션 그림처럼 독립적인 이야기를 가진 그림들인데 이 시절의 경험들을 보면, 그래서 그랬구나 하는 생각에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글 없는 그림책 세계의 문 앞으로 한 발짝 한 발짝 다가가고 있던 와이즈너는 로드 아일렌드 디자인 학교에서 그 문으로 들어가는 열쇠를 손에 넣는다.

디자인 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만난 룸메이트는 데이비드에게 다양한 글 없는 그림책들을 보여주기 시작했는데, 처음 그는 이 책들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 1년 반쯤 후에 친구와 함께 간 어느 도서관에서 칼데콧 상을 받기도 한 린다 월드(Lynda Ward)의 작품을 보고는 그림이 들려주는 이야기, 글자 없는 책의 가능성에 대해 진지하게 이 세계에 대한 탐색을 시작한다.

3학년에 접어들면서 와이즈너는 유화를 비롯한 본격적인 그림 기법들을 배우는 한편, ‘변신’이라는 주제로 길이 10피트, 높이 40인치짜리 벽화를 그렸다. 오렌지 조각이 녹아 요트가 되었다가, 다시 물고기가 되고, 이것마저 녹으면서 다른 것들로 계속 변해 가는 일련의 그림들은 전혀 관계없는 사물들이 관점을 조금만 달리 하면 어떤 연결 고리가 생기고, 이 그림들간의 연결로, 이야기가 되는 영화나 애니메이션과 같은 효과를 보여줄 수 있다는 원리를 터득하는데, 이 원리야말로 글자 없는 그림책의 기본 바탕이 된다. 3학년 때 벽화 제작에 심혈을 기울였던 와이즈너는 이 때 터득한 기본 원리를 바탕으로 4학년이 돼서는 글 없는 그림책을 만들기 시작하는데 그는 이 일을 위해 학교를 다녔다.

벽화를 만들 때 톰 소로스(Tom Sgrous) 교수가 그랬던 것처럼, 데이비드 맥컬리 교수는 와이즈너 뒤에 서서 문자로 된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재구성하는 방법, 중요한 부분들을 화면에 나타내는 시점과 구도를 포착해 내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여덟 단계의 창작 과정을 거치는 동안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자유롭게 실험할 수 있는 학교, 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각자에게 맞는 적절한 조언과 지도를 아끼지 않은 스승들이 없었다면 데이비드 와이즈너가 과연 그만의 독특한 작품 세계를 창조한 그림책 작가가 될 수 있었을까?

그렇다 아니다를 확실히 말할 순 없지만 1992년 칼데콧 상을 안겨준 <이상한 화요일>을 톰 소로스 교수에게, 10년 뒤 두 번째 칼데콧 상을 안겨다 준 <아기 돼지 세 마리>는 데이비드 맥컬리 교수에게 바친 것으로 봐서 와이즈너에게 로드 아일랜드 디자인 학교 시절이 작품 세계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건 짐작해 볼 수 있다.

작가가 되기 위해 이제 그가 배워야 할 일은 끝났다. 4학년 때 그림책을 만들면서 ‘언젠가는 내가 만든 이야기책을 출판해 보고 싶다’라는 작가가 되고 싶은 동기까지 얻었으니 학교가 그에게 해 줘야 할 일은 더 이상 없는 샘이다.

졸업 후 데이비드 와이즈너는 다른 대부분의 그림책 작가들처럼 잡지나 책의 표지를 그리면서 자기 책이 나올 그 날을 기다렸다. 그 사이 다른 작가들의 이야기에 그림만 그린 그림책 몇 권을 출판하기도 했고, <E.T.> 같은 영화를 그림책으로 재구성하는 일도 하면서 실제적인 경험을 쌓아나갔다.

데이비드가 바라던 그 날은 졸업한 지 10년이 지난 1988년에 찾아온다. 체스를 좋아하는 한 소년이 꿈속에서 이불이 장기판으로, 장기판이 사람으로, 책이 성으로 변하고, 소년이 여행하던 도시는 책장이 바람에 날리듯 떨어져 내리면서 또 다른 무언가로 계속 변해가는 이야기다. 대학 3학년 때 제작한 ‘변신’이라는 벽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이 책은 책장 하나하나를 뜯어 이어 붙이면 하나로 이어진 두루마리 그림병풍이 될 것 같은 책이다. 이 책으로 그는 칼데콧 아너상을 수상했고, 그림으로만 이야기하는 어린이 그림책의 성공 가능성을 조심스레 확인했다.

3년 뒤인 1990년에 와이즈너는 <허리케인>이라는 작가의 전기적인 작품으로 미국 서점협회가 선정한 올해의 좋은 책 상을 받으면서 또 한번 독자들에게 널리 이름을 알렸다. 그리고 1년 후에는 해가 지자 두꺼비와 개구리가 마법에 걸려 연잎을 타고 하늘을 난다는 초현실적 이야기를 영화 같은 그림으로 엮어 낸 <이상한 화요일>로 칼데콧 상을 받았다. 이제 그의 작품들은 미국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어른 아이를 막론하고 독자들의 확실한 지지를 받기 시작했다.




<이상한 화요일> 이후에도 그는 다른 그림책 작가들에 비해 많지는 않지만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으며, 작품이 뛰어난 만큼 그 보상 역시 확실했다. 2000년에는 뉴욕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전망대에서 길을 잃은 소년이 구름공항에 가서 구름들에게 재미있는 모양을 만들어 주는 <구름공항>으로 또 한번 칼데콧 아너상을 받았고, 2002년에는 우리가 잘 아는 ‘아기 돼지 세 마리’를 새롭게 해석한 <아기 돼지 세 마리>로 두 번째 칼데콧 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 결과에 만족하지 않고 지금도 부인과 두 자녀와 함께 미국 위스콘신 주, 밀워키에 살면서 환상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한 그림책을 만들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하고 있다

 

- 북보트에서 퍼옴

 

그의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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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4ajo 2004-06-21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여기로 ^^

http://www.houghtonmifflinbooks.com/authors/wiesner/


The Three Pigs에 대한 활용자료가 있는 곳

http://www.vickiblackwell.com/lit/threepigs.html

밀키웨이님 꼬리에서 가지고 온 내용임.